한국인, 노천(露天) 문화에 푹 빠지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8-16 오전 10:09:00
산들바람 속에서 커피도 마시고 온천도 즐기고…

지난 6월 29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2동 홍릉근린공원 내에 문을 연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는 명물이
하나 있다. 4층 옥상에 마련된 자연체험학습장이 그것. 입구에 들어서니 사방이 탁 트인 130평의 공간
이 펼쳐진다. 원추리, 영산홍, 붓꽃, 꿩의비름 등 23종의 식물이 가장자리를 따라 빙 둘러져 있고 중앙
에는 대나무로 지은 원두막 한 채가 시원스레 서 있다. 곡선으로 된 산책로를 따라 양 옆에는 원목으로
된 탁자와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다. 두 자녀와 함께 화단 난간에 걸터앉아 찐 옥수수를 먹고 있던 김선
영(36)씨는 “좋다는 소문이 자자해 답십리에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왔다”고 말했다. “아이들
과 책을 읽다가 잠깐 쉬러 올라왔어요. 자연을 벗 삼아 휴식할 수 있어 아이들 정서 발달에도 좋은 것
같아요. 저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네요.”


옥상뿐만이 아니다. 이 도서관에는 각 층마다 화단을 갖춘 테라스 공간이 조성돼 있다. 책을 읽다 잠시
나가 머리를 식힐 수도 있고 읽던 책을 갖고 나갈 수도 있다. 1층 어린이도서관 옆 테라스에서 동화를
읽고 있던 박한아(서울 종암초등 4년)양은 “도서관 여기저기에서 녹색을 볼 수 있어 눈이 피곤하지 않
다”며 즐거워했다. 도서관 홍보를 맡고 있는 사서 김정규씨는 “우리 도서관이 개관 1개월여 만에 2만
명 이상의 방문자를 기록한 데는 테라스 공간과 옥상 자연체험학습장의 공이 크다”며 “주말이면 가족
단위 방문객이 옥상에서 가벼운 음식을 싸와 책을 읽으며 휴식하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고 말했
다.

서울 청담동 등 일부 지역에서 카페테리아의 용도로 활용되던 노천 공간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도서
관은 물론 대중 온천과 대형 쇼핑몰,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노천 공간 없는 건물’이 없을 만큼 각광
을 받고 있는 것. 예전의 노천 공간이 건물과는 별도로 ‘사후 급조’되는 경향이 많았다면 요즘 등장하
는 노천 공간들은 철저하게 건물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는 것이 특징이다.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은 시공사였던 포스코건설이 설계 당시부터 실내·외 공간의 조화를 고려해 노천
공간을 조성했다. 국내 도서관으로서는 첫 시도였다. 작년 11월 입주를 시작한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금
호어울림아파트는 단지 내에 노천 카페와 지압로, 야외 헬스가든, 유아풀 등을 설치해 입주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2년 전 완공돼 ‘일산의 명물’로 자리잡은 쇼핑몰 ‘라 페스타’도 일찌감치 노천 공간
을 도입해 성공한 케이스. 두 개의 쇼핑몰을 구름다리 형태로 연결해 놓은 이곳은 건물 바깥쪽 점포를
중심으로 테라스 공간이 마련돼 있고 전체 건물의 가장자리에 충분한 너비의 캐노피(차양)를 설치해 비
가 오더라도 쇼핑이나 산책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노천 공간의 도입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작년 말 광진구 자양동에 문을 연 피트니스 클럽 ‘해피데이’
는 최근 유휴 공간이었던 옥상 100여평에 공원과 마사지 테라피 기능을 갖춘 노천 스파, 족욕(足浴) 시
설 등을 설치했다. 공사가 끝난 후 평일 1300명, 주말 2500명 수준인 일일 입장객의 70% 정도가 옥상을
찾는다. 해피데이 서경범 이사는 “처음엔 나이 드신 어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마사지 효과 등 치료
기능을 강조했는데 막상 문을 열어보니 가족 단위 입장객이 많더라”며 “젊은 여성과 어린이의 반응이
특히 폭발적”이라고 귀띔했다.

서울의 상징 N서울타워(구 남산타워)에도 노천 공간으로 이름난 곳이 있다. 야경을 바라보며 맥주나 음
료를 즐길 수 있는 ‘비어 가든’과 방문객 누구나 자유롭게 올라가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
는 ‘루프 테라스’. 작년 12월 CJ그룹이 타워 소유주인 YTN으로부터 10년간 위탁운영권을 위임 받아
150억원을 들여 공사를 마친 후 새롭게 탄생한 공간이다. 7월 폭우가 지나간 후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
되면서 남산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가 이곳의 ‘피크
타임’. 지난 8월 2일 이곳을 찾았을 때, 테이블이 15개밖에 되지 않는 비어 가든은 대기자 명단에 이름
을 올려놓아야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였다. 바로 한 층 위 루프 테라스 역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기려는 연인과 가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CJ엔시티 마케팅팀 이주
희 부장은 “단순한 전망 공간으로 두었던 곳인데 올 6월부터 1층은 야외 펍(pub)으로, 2층은 테라스 광
장으로 꾸미자는 아이디어가 나와 실행에 옮겼다”며 “루프 테라스에서는 매주 토·일요일 야간 무료
공연이 열리고 자동차나 화장품의 런칭 이벤트가 마련되는 등 볼거리가 제공돼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
다”고 말했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한국의 노천 공간은 사실 아이러니한 부분이 없지 않다. 노천의 한자
어는 ‘露天’. 우리말로 풀이하면 ‘지붕 등으로 가리지 않은 바깥’, 즉 ‘한데’가 된다. 전통적으
로 우리나라에서 ‘한데’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됐다. 어르신들이 곧잘 쓰는 “한데에서 자지 마
라” “한데에서 고생이 많구나”라는 표현의 뜻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이 계절의 변화가 크지 않은
미국 일부 지역 및 유럽 국가들과 달리 사계절이 뚜렷하고 비바람이 잦은 우리나라는 노천 문화가 자리
잡기에 적절하지 않은 환경이라는 게 건축업자나 상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실제로 1년 365일 중 황사
가 심한 봄, 장맛비와 폭풍에 시달리는 여름, 야외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겨울 등 노천 활동이 곤란한
일수를 빼면 실제 노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날은 30%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노천 공간이 각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 유입된 노천 문화는 본디 우리 것이었다기보다는 외국에서 유입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로 네덜란드와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와 캘리포니아 등 미국 남부 일대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광장과 노천 카페테리아 등 노천 문화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왔다. 해외 여행 자유화로 이국적 풍취를 접
할 기회가 많아진 사람들 사이에서 노천 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국내에서 처
음 노천 카페테리아 조성 등으로 입소문이 난 곳이 일명 ‘트렌드 세터’들이 모여든다는 서울 청담동
일대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노천 문화가 발달한 나라 대부분이 선진국이라는 점도 노천 공간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
다. 브런치 메뉴로 유명한 청담동의 ‘하루에’나 도산공원 앞 ‘느리게 걷기’ 등은 몇 년 전부터 ‘유
럽풍’ 노천 카페를 표방하며 손님몰이에 성공했다. 예쁜 테라스 카페테리아가 많기로 이름난 서울 반
포 서래마을 역시 이곳을 거점으로 모여 사는 프랑스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최근의 ‘노천 붐’은 친환경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현대 도시인의 욕구와도 맞아떨어진다. 답답한 실내
를 벗어나 하늘을 볼 수 있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야외 공간에 머물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이 결
과적으로 노천 공간의 확대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특히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노인층
은 노천 공간의 출현을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다. 일산 라 페스타 내 한 카페테리아 테라스 공간에서 만
난 백형진(75)씨는 “나이 들면서 기관지가 안 좋아져 에어컨 바람을 쐬면 너무 괴롭다”며 “바깥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커피 한잔 하니 기분이 최고”라고 말했다. 해피데이에서 만난 김옥림(76)씨 역시
“온천을 즐기며 공원에 핀 꽃도 감상하고 가끔 하늘도 올려다 볼 수 있어 올 때마다 옥상으로 향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노천 공간들이 커피와 음료, 맥주 등의 판매와 맞물리며 상업적으로 활용된다는 점 역시 노천
문화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노천 공간을 원하는 소비자와 이를 통해 수익 모델을 찾으려는 상인들 간
의 이해 관계가 맞물리면서 노천 공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는 해석이다. 라 페스타에 이어 용산
역사 내 ‘아이파크몰’과 경기 부천의 대형 쇼핑몰 ‘소풍’ 등을 잇달아 설계한 해안종합건축사사무
소 김태만 소장은 “노천 공간을 갖춘 쇼핑 공간은 상인이나 고객이 모두 반기는 추세여서 앞으로도 계
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천이 활성화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닌 탓에 우리나라의 노천 공간들은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노천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각종 묘책이 동원된다. 건물 전체를 병풍처럼 두르는 캐노피
가 설치된다든가(라 페스타), 강화유리를 사용해 답답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가랑비 정도는 막을
수 있는 투명 루프를 올린다든가(N서울타워 비어 가든) 하는 식이다. 직접 들어갈 수는 없지만 건물 한
가운데에 미니 정원을 조성해 통유리로 감싼 후, 바깥에 의자 등을 설치해 노천 분위기를 낸 곳도 있다

둘째, 노천이 단순히 바깥 경치를 즐기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 가지 목적성을 갖춘 공간으로 조
성되고 있다. 야생식물을 심어 자연관찰이 가능하게 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의 자연체험학습장이나 노
천 온천 바로 옆에 족욕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를 조성한 해피데이의 하늘공원 노천탕이 그 예다.

노천 공간과 관련, 김태만 소장은 지나치게 경직돼 있는 우리나라 건축 규제에 아쉬움이 많다. “처음
라 페스타를 기획했을 땐 테라스 공간이 중앙 보도 일부를 차지하는 구조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데 건물과 도로를 자로 잰 듯 명확하게 구분, 책임 관계를 따지는 법규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지
요.” 김 소장은 “유럽의 노천 공간들은 대개 보도와 테라스의 구분이 따로 되어 있지 않아 보행자가
자유롭게 이동하며 즐길 수 있게 돼 있다”며 “우리나라도 규제 적용에 유연성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폭발하는 노천 공간의 수요에 비해 관련 법규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해피데이 서경
범 이사는 “처음 옥상에 노천 온천을 만들겠다고 신고를 했더니 몇 평 이상은 반드시 공원으로 조성해
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공원 형태를 겸한 온천을 조성해 문을 열었다”고 설명했
다.

덴마크 코펜하겐 중심부에는 ‘스트뢰에(Stroget)’라는 보행자 가로(街路)가 있다. 1962년 북유럽에서
최초로 조성된 거리이자 유럽에서 가장 긴 ‘자동차 없는 거리’이기도 하다. 매일 5만5000여명의 보행
자가 이 길을 걸으며 쇼핑과 산책을 즐긴다. 이 가로의 인기에 힘입어 코펜하겐시는 주변부에도 속속 스
트뢰에와 같은 가로를 조성했다. 그 덕에 40여년이 지난 현재 코펜하겐 시내에는 1962년 당시보다 6배
나 많은 보행자 전용 가로가 생겼다. 도시공학자 박용남씨는 근간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에
서 스트뢰에 사례를 소개하며 “오늘날 코펜하겐이 유럽을 대표하는 모범적 환경도시의 원형으로 성장하
는 데는 스트뢰에의 역할이 컸다”고 분석했다.

도시의 형태를 연구하는 전문가와 건축가들은 노천 공간의 증가를 반기는 분위기다. 건축가 김진애씨는
‘우리 도시 예찬’이라는 책을 통해 “도시가 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길을 살려야 하고 되도록 개
별 건축물 단위로 자유롭고 다양한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양한 노천 공간의 조성
과 발전이 획일적이기 쉬운 도시에 개성을 부여하고 색을 입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김태만
소장 역시 “앞으로 설계하는 모든 건물에 노천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6년, 대한민국
은 늘어나는 노천 공간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며 ‘제2의 덴마크’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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