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마저 숨 삼킨 연초록 물그림자 _경북 청송 주산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6-10 오전 9:13:00
소리마저 숨 삼킨 연초록 물그림자
[한겨레 2006-06-08 21:57]

경북 청송 주산지

물 맑은 계곡을 따라 노란 애기똥풀과 기린초, 하얀 찔레꽃과 초롱꽃, 붉은 지칭개 등이 탐스럽게 핀 오
솔길. 그 길 끝의 옥빛 저수지가 연초록빛 산그늘 속에 숨어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잔 물비늘 파르르 일어나는 두메 저수지 청송 주산지에는 파란 하늘이 오롯이 담겨 있
다. 시간이 멈춰선 그곳에 수령 100년이 훨씬 넘은 능수버들과 200년을 헤아리는 왕버들 30여 그루가 몸
을 담근 채 데칼코마니처럼 수면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간혹 청호반새나 물총새가 피
라미나 민물새우를 채려고 물살을 그을 때마다 작은 동심원이 일렁일 뿐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다. 고요
한 물그림자를 바라보다 문득 시간과 소리가 소멸된 무채색의 세계에서 묘한 적막감과 평온함을 느꼈
다.

주산지에서 만난 대구 대경대 한상덕 교수(연극영화과)는 “주산지는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시간을
잊고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청송군 부동면 주왕산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잡은 주산지는 주산 계곡에 흘러내린 물을 가둬 모은 길이
100m, 너비 50m 남짓의 조그만 인공호수다. 286년 전인 1720년 8월 조선조 숙종 46년에 마을 주민들이
가뭄을 대비해 주산 계곡에 제방을 쌓았다. 낙동 정맥 분수령 가까이 있는 덕에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
어도 바닥이 드러난 적은 없다. 지금도 아랫마을인 부동면 이전리 사람들은 봄철이면 이 물을 빼내 농사
를 짓는다. 둑에 세운 작은 비문에는 ‘둑을 쌓아 물을 막아 만인에게 혜택을 베푸니 그 뜻을 잊지 않도
록 한 조각돌을 세운다’는 한자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록 저수 면적 1500여평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호수지만 인간을 비롯해 주왕산을 터전삼아 살아가는
뭇 생물들의 삶과 죽음을 포용하는 넉넉한 곳이다. 김기덕 감독이 사계절의 변화를 배경으로 이곳에서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촬영한 연유를 알 듯하다.

주산지는 새싹이 돋는 4월 말부터 5월 초의 봄철까지는 물론이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초가을 새벽에도
전국에서 풍경사진가들이 찾아든다고 한다. 주왕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조성래 팀장은 “특히 10월 중
순이면 주산지로부터 계곡을 따라 별바위까지 이르는 등산로 주변의 당단풍나무·붉나무 등의 숲이 온
통 붉은 단풍으로 물들면서 운치있는 별천지로 변신한다”고 일러주었다.

주산지 옆으로는 주왕산의 숨은 계곡으로 일컬어지는 절골이 자리하고 있다. 주왕산의 다른 계곡에 비
해 외지인들에게 덜 알려진 탓에 때묻지 않은 자연미를 느끼게 된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비경이 절골 매
표소에서 멀지 않아 손쉽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신록이 짙어가는 절골 가는 길은 몹시 아름다왔다. 매표소를 지나 당단풍나무와 물푸레나무, 병꽃나무들
이 우거진 계곡을 들어선 뒤 15분쯤 오르자 바위 협곡이 반긴다. 나무 계단과 다리를 건너 바위 협곡을
빠져나오니 아늑한 골짜기에는 맑은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태고적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간혹 인기척
에 놀라 달아나는 다람쥐와 나비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할 뿐이다.

청송에서 좀더 여유가 있으면 126년 역사를 간직한 송소 고택에서 운치있는 하룻밤을 보내볼 만하다. 10
대를 내려오며 만석지기의 부를 누려온 청송 심씨 심부자가 1880년 지은 송소고택은 그 내부만 1700평이
며 뜰까지 포함하면 3000평에 이르는 99칸 고택이다. 솟을대문에 홍살을 설치했고 큰 사랑채는 정면 5
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다. 조선시대 대
갓집의 특징을 잘 간직한 고택은 한옥체험 숙박 장소로 그만이다.

송소고택 관리인 류기호씨는 “가족들이 하룻밤을 옛날 방식대로 보내면서 소중한 시간과 추억을 여유롭
게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며 “한번 다녀가신 분들이 시골의 고향집처럼 생각하고 꼭 다시 찾는다”고
말했다.

물의 마음은 무심이다. 그 무심 속에는 뭇 생명을 담는 너그러움이 깃들어 있다. 청송 주산지와 절골 계
곡에서 시간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물의 마음을 배운다.

주왕산/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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