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백만명이 오가는 지하철 역. 일과 관련한 사람을 만나거나 오랜만에 연락이 된 친구를 만나
보려고, 회식이나 약속 장소에 늦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지하철을 이용한다.
이런 사람들의 발길을 6년째 잡아채고 있는 김태경(23·한국종합예술학교 4년)씨는 한마디로 ‘지하철에
서 피리 부는 소녀’다.
10일 오후 5시, 사당역 한쪽에 마련된 공연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그만 무대 앞에 놓인 20여개의 의자에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팔
짱을 낀 채 ‘뭘 하려는 걸까’ 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서성거리는 사람까지.
김태경씨가 체구만큼 가냘픈 피리를 손에 들고 영화 ‘타이타닉’의 배경음악을 연주할 때쯤에는 꽤 많
은 사람들이 귀를 열고 김씨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나왔고,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그렇게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각자 갈 길로 향
했다. 김태경씨는 이 같은 지하철 공연을 고교 2년 때부터 해왔다.
“처음에 이수역에서 공연했는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전통적인 공연만을 보여줘야 한
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찌 보면 지금 국악의 상황과 비슷하다. 지하철 국악 공연이 나름의 인기를 얻
게 된 것은 뜨락 멤버들과 공연을 재밌게 꾸려가면서부터다. 한국종합예술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뜨락은
순수 아마추어 국악 실내악단. ‘이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세쌍둥이도 뜨락 멤버다.
이때부터 지하철 공연의 장점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가용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과 다르
게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소시민이라 할 수 있잖아요. 무대 뒤에서 의자를 정리하며 지켜보면 이
상하게 지하철 공연을 즐기는 분들은 대개 그런 분들이더라고요. 그분들께 어떻게든 기쁨을 드리고 싶었
어요.” 물론 힐끗 한 번 쳐다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고, 인근의 좌판에 더 관심을 갖는 행인도 있다.
하지만 자유롭게 연주를 들을 수도 있고, 흥이 나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거나 마음대로 엉덩이를 들썩
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하철 공연장. “함께 지하철 공연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봐도 정식 공연 때
와는 다른 희열을 느끼게 되죠.” 가끔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 쥐어주는 사람도 있
다. “기분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관객들이 가장 냉정한 곳이 지하철 공연장인데 정말 재밌었으니까 돈
을 주신 거겠죠.” 지금은 냉정한 지하철 관객을 끌어들이는 나름의 노하우도 터득했다. “처음부터 전
통 음악을 들려드리지는 않아요. 팝송 연주나 흔히 귀에 익은 음악으로 발길을 멈추게 한 다음 전통 음
악을 들려드리는 거죠.”
김태경씨가 지하철 공연에 바쁜 시간을 쪼개 공들이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
터 피리를 불었는데 명절 때 친척들이 해보라고 해서 피리를 불어드리면 다들 좋아했어요. 그럴 때면 가
요는 왜 인기가 있고, 국악은 왜 인기가 없을까. 클래식은 많이 들으면서 왜 우리 음악은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런 고민들은 ‘국악 하는 사람들의 노력 부족’이나 ‘들을 만한 공연이
없어서’ 등 나름의 해법을 내놨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는 게 김씨의 설명. “접근성이 떨어
진다는 거죠. 전통음악을 제대로 공유할 만한 창이 없었다고 봐야겠죠.” 그러다 고2 때 지하철 공연을
기획하는 레일아트를 알게 됐고,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된 것.
“억세고 힘든 악기인 피리를 비롯한 국악 연주를 통해 일반인에게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
하거든요.” 국내 국악계에서 여성 피리 주자가 활동한 지는 고작 20여년. 가장 나이 많은 여성 주자가
40대 중반이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주자들은 30대 후반이다. 작고 아담하지만 폐활량이 유달리 좋
아야 연주가 가능한 악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연주하는 악기는 피리 이외에도 태평소, 생황이 있다. 전
공이야 피리지만 공연에서 쓰이는 비율로는 세 악기가 모두 같다고.
전통악기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북한과 중국은 음역이 좁고 악기 개량이 많이 된 상태다. 남북이 갈
라진 뒤 남한은 전통악기는 개량이 안 되고 있는 상태라고. 어찌 보면 전통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금처럼 대중의 관심이 멀어진 상태라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지금에야 피리를 무엇보다 아끼는 김태경씨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을 뿐이
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농악을 했고 중학교 1년 때부터 피리를 불었죠. 어릴 때만 해도 국악이 딱
히 재미있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중·고교(서울국악예술학교)를 거치며 흥미가 생겨서 대학은 일부러 예
술학교에 진학했어요.”
힘든 날도 있었다. “대학입시 때도 그렇지만 도대체 이게 음악인가 싶었어요. 호흡도 힘들어 운동을 하
는 건지 음악을 하는 건지 정체성이 흔들릴 때도 있었거든요. 연습을 무리하게 해서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음악이 뭔지, 아름다운 게 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2004년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원
했던 동아 콩쿠르 금상을 받은 뒤에도 고민은 이어졌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여전히 답은 모른다. 그저 피리가 좋을 뿐이고, 국악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뿐.
요즘 김태경씨는 지하철 공연 말고도 학교 공부에 ‘올인’ 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출을 배우
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젊은 층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국악도 변화가 필요할 것 같아요. 연주도 연
주지만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관객의 호응이 달라지거든요.” 국악 공연을 아무리 많이 기획한 연출
가라 하더라도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고 전통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제대로 느낌을 살리기
힘들다는 것이 김태경씨의 설명. “부전공으로 택한 연출 말고도 작곡을 배우고 있는데 아마 학교도 1
년 늦게 졸업할 것 같네요.”
하지만 그다지 밝지 않은 미래. 졸업 후 악단 취직 자격이 주어지지만 서울 인근에서 피리 전공자가 갈
수 있는 악단이라고는 국립국악원, KBS 국립관현악단 등 5군데 정도다. 게다가 한해 1∼2명 정도만 악단
에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개인 활동을 한다. 객관적으로 미래가 어떻겠느
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던 김태경씨는 “중1 때부터 매일 함께해온 피리라서 객관적인 평가가 안 되
죠. 그냥 잘됐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라고 답하며 웃는다.
일단은 24일 피리 전공자 16명 중 14명이 참가하는 ‘해피 뱀부’ 공연이 주 관심사다. 올해가 2회째인
‘해피 뱀부’ 공연은 지난해 한 선배의 제안으로 시작됐고, 관객의 호응도 뛰어났다. “국악을 통해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층과 공감하는 자리입니다. 작년에 ‘대박’이었다니까요. 관람료는 따로 없으니
꼭 많이 찾아주세요.”
글·사진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