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정재숙.최승식] 서울에서 조선조 600년 도읍지의 흔적을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북촌.
'한옥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진다'며 북촌 한옥마을을 지키겠다고 나선 이는 여성들이었다.
1990년대 불도저에 밀려 하나 둘 쓰러지던 한옥을 사들여 제대로 된 옛 집으로 고친 이들은 처마 하나,
마루 한쪽을 소중히 하며 후손에게 물려주겠다고 알뜰살뜰 돌보고 있다.
"우리는 한옥을 사랑한 죄밖에 없어요."
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 최순희(까사미아 디자인연구소장)씨 집 대청마루에 모인 '한아모(한옥 아낌
이 모임)' 회원 6명은 속상한 얼굴로 입을 모았다. 2000년 사라져 가는 전통 한옥을 되살리자고 뜻을 모
은 여성 30여 명이 모임을 만들었다. 한옥이 빽빽이 모여있는 서울 북촌의 옛집을 보존하자며 팔을 걷어
붙인 지 6년. 자칫 흙먼지로 쓰러져 갔을 한옥 20여 채를 살려냈다.
문제는 한아모 활동을 오해하는 몇몇이다. 한옥을 제대로 복원해 조선 600년의 흔적이 살아있는 동네로
키우자는 진심을 오해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마구잡이 개발이니, 투기니 하는 일부 비난을 듣자니 한옥
사랑이 죄가 돼버린 느낌이란다.
"김홍남 국립민속박물관장, 정미숙 한국가구박물관장 등이 북촌 가꾸기 사업을 일으킨 때는 개발 바람
에 한옥이 다 없어지겠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어요. 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드나들던 제가 봐도 그랬어
요. 그리운 고향의 정감을 느끼려 서울에 올 때마다 들르던 인사동과 가회동 한옥동네가 헐려나가기 시
작하는데 걸어다닐 곳이 없더라고요."
한아모 탄생 때 총무를 맡았던 화가 노정란씨는 한옥사랑의 순수함을 강조했다. 그는 "친구와 후배를 끌
어모아 '한옥은 여자가 지키자'고 부추겼던 두 선배 노력 덕에 북촌이 이나마 살아있는 것"이라고 장담
했다. 정부가 다 사들일 수 없으니 시민이 나서 문화재를 보호한 셈이다. 이제는 문화유산 지킴이인 재
단법인 '아름지기'(www.arumjigi.org)도 북촌에 한옥 사무실을 내고 한옥 제대로 살리기에 나서고 있어
한아모로서는 동지를 얻었다.
얼마 전 해묵은 한옥을 사들여 공사 중인 도예가 박실씨와 조해경(갤러리 조 대표)씨는 "일부 주민이 집
을 마구 뜯어고친다고 곁눈질로 흘겨보는데 오히려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스웨덴
사람인 남편 호칸 보린과 함께 한옥을 고쳐 사는 최미경씨는 "오래된 재목은 썩어 버렸고 수리 과정에
서 콘크리트 범벅을 하거나 철근을 박아버려 하나하나 뜯어낸 다음 고증해 가며 새로 지었다"고 설명했
다. 아파트가 가장 인기있는 주거 형태가 된 뒤 천덕꾸러기가 된 한옥은 1930년대에 멈춰선 상태여서 겉
과 속이 다 엉망으로 방치돼 제모습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가회동 한옥 되살리기 작업에 여러 번 참여했던 건축가 황두진씨는 "지금 북촌은 매우 중요한 시점을 맞
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종합대책으로 한옥이 대량으로 헐려나가는 일은 일단 막았지만
여전히 '개별 한옥을 얼마나 잘 고쳤느냐'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황씨는 "북촌은 단순한 한
옥 전시장이 아니라 하나의 동네로서, 살아있는 도시의 한 부분으로서 사람이 있고 고유한 문화가 있어
야 한다"고 말했다. 몇 달 전 가회동 한옥마을 주민이 된 박희양(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 상임이사)씨
는 "한 10년쯤 지나면 '아직도 강남 사십니까'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며 북촌살이의 즐거움을 설명했
다.
아름지기가 올해 전통 문화 강좌의 주제 가운데 하나를 '도심 속 한옥마을, 북촌'으로 잡은 까닭이 여기
에 있다. 16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 제1강의실에서 열리는 첫 시간 주제는 '한옥
도시 북촌'. 송인호 서울시립대 건축과 교수가 전통의 보존을 넘어 다양한 실험의 현장으로 거듭나고 있
는 한옥마을의 오늘과 내일을 살핀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