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수표에 주민번호 써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3-09 오전 10:15:00



ⓒ2006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사보강 : 8일 오후 2시 15분]

유통업체 직원 "수표 뒷면에 고객님 성함과 주민등록번호(이하 주민번호)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소비자 "법적으로 주민번호를 적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름과 연락처만 적겠습니
다."
유통업체 직원 "본사의 지침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민번호 기재를 거부하면 수표를 받
을 수 없습니다."

자기앞수표로 계산을 할 때 법적으로 수표 소지자는 주민번호를 배서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일부 유통
업체와 재래시장이 여전히 주민번호 기재를 요구해 개인정보 노출의 사각지대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 제
기되고 있다.

최근 '리니지 사태'에서 그 심각성이 드러났듯 온라인뿐만 아니라 이 처럼 오프라인 상에서도 주민번호
유출이 일상화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정보가 범죄피해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6일 대형 할인점, 슈퍼마켓, 재래시장 등을 돌며 살펴본 결과,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수표에 배서할 때 주민번호 기재를 놓고 업체와 고객 간의 혼선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표
소지자는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 배서 때 주민번호 기재를 꺼린 반면 수표를 받는 쪽은 부도수표 피해
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민번호 기재를 요구했다.

"수표 주민번호 배서 본사 지침에 따른 것"

먼저 취재진이 찾아간 곳은 GS수퍼마켓 공릉점. 취재진이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10만원짜리 수표를 제시
하자 계산대 직원은 수표 뒷면에 주민번호 배서를 요구했다. 취재진이 "법적으로 주민번호를 써야 할 의
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자 이 직원은 "본사 지침이 그렇다. 주민번호 배서를 거부할 경우
수표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같은 슈퍼마켓 관악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GS수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GS리테일 홍보팀 서일호 대리는 "주민번호를 적지 않을 경우 도난수표 발
생 비율이 높아 원칙적으로 이름, 전화번호, 주민번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서 대리는 다만 "고객이
주민번호 기재를 거부할 경우 ARS(전화자동응답기)를 통해 부도수표 여부를 확인한 뒤 수표를 받고 있으
나 이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객 불편도 커 주민번호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수표에 배서할 때 수표 소지자는 법적으로 주민번호를 써야할 의무가 없다. 수표법 16조에 따르
면 배서인이 수표를 낼 때 기명날인 또는 서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은행연합회 규정집에도 수표
를 사용하는 사람이 본인인 경우 실명만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즉 주민번호를 반드시 적어야 한다는 규
정은 관련 법규 어디에도 없다.

이 같은 법규정에 따라 금융감독원은 지난 2003년부터 수표 뒷면 배서란의 기재양식을 고쳤다. 이전 배
서란에는 성명, 주민번호, 주소, 연락처를 기재하도록 돼 있었으나 개정 이후에는 성명과 실명확인 번호
만을 적도록 했다. 수표 배서 때 주민번호를 써야 하는 법규가 없어 주민번호 대신 주민번호와 계좌번
호, 지로코드 등에 해당하는 실명번호 확인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도 할인점, 슈퍼마켓, 재리시장에선 여전히 주민번호 기재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부도수표에
대한 안전장치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아 주민번호 배서 관행을 고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분실이나 도
난 등 부도수표로 인한 피해를 해당 업체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관행'대로 주민번호 배서
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금융감독원은 지난 2003년부터 수표 뒷면 배서란의 기재양식을 고쳤다. 이전 배서란에는 성명, 주민
번호, 주소, 연락처를 기재하도록 돼 있었으나 개정 이후에는 성명과 실명확인 번호만을 적도록 했다.

ⓒ2006 오마이뉴스 권우성


"도난수표 누가 책임지나" 주민번호 기재 관행 여전

이 같은 목소리는 주로 재래시장에 크게 들렸다. 일명 '도깨비 상가'로 불리는 남대문시장 내 수입품 매
장. 가게마다, 상점 주인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수표 배서 때 주민번호 기재를 요구했
다. 그곳에서 20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는 윤철영씨(52)의 얘기를 들어봤다.

"재작년 추석 때 물건값으로 받은 수표 중에 뒷면에 주민번호가 없는 수표의 상당수가 도난수표였어요.
그 때 이후로 반드시 수표를 받을 경우 주민번호 기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윤씨의 고충은 더 이어졌
다. "주민번호 기재를 요구하면 일부 고객들은 '사람을 왜 못 믿느냐?'며 다른 가게로 발길을 돌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도난수표에 따른 손실을 막으려면 주민번호 기재가 최소한의 방어수단입니다."

윤씨에게 "수표에 배서할 때 반드시 주민번호를 써야 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윤
씨는 "그럼 부도수표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느냐"며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대형 할인점은 어떨까. 취재진은 이마트 서울 용산점에 가봤다.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10만원짜리 수표
를 제시하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성명과 주민번호 기재를 요구했다. 주민번호 기재를 거부하자 재래시
장과 달리 자체 단말기를 통해 부도수표 여부를 확인한 후 수표를 받았다. 롯데마트 서울 보라매점에서
도 주민번호 기재를 거부할 경우 도난수표 여부를 조회한 뒤 수표를 받았다.

탁용규 롯데마트 마케팅팀 과장은 "모든 수표는 원칙적으로 일일이 수표번호를 전산조회한 뒤 부도여부
를 확인하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지 않을 경우 굳이 주민번호를 기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법 따로 규정 따로... 혼선 가중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법규정에는 수표 배서 때 주민번호를 기입할 의무가 없지만 '관행'상으
로는 여전히 주민번호 기재가 이뤄지고 있다. 한마디로 '법 따로 관행 따로'인 셈이다.

문제는 수표 주민번호 배서를 놓고 법과 관행이 따로 적용되고 있는데도 해당 업체를 처벌할 규정이 마
땅히 없다는 데 있다. 수표 배서 때 주민번호를 기재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민번호 기재 여부는 수표 소지자와 수표를 받는 쪽의 합의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즉 양측의 합의에 따라 주민번호를 적지 않을 수는 있지만 수표를 받는 쪽이 주민번호 배서를 요구할 경
우에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수표를 주는 쪽 외에 수표를 받는 쪽의 입장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수표 배서 때
주민번호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새로 만드는 것은 현 상황에서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개인정보 범죄 악용땐 소비자만 피해

그러나 수표 배서 때 주민번호 기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유출된 개인정보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
기 때문이다. 진보네트워크참세상에 따르면 주민번호 등 개인정보 침해 사례가 지난 2000년 900여건에
서 2004년 9000여건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여기에 개인정보 유출로 피해를 입더라도 이를 구제받기
어렵다는 데 더 큰 심각성이 있다.

바른소비자들모임의 권창한 변호사는 "개인의 신상정보가 수표 배서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흘러 들어
갈 경우 각종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여지가 상존한다"며 "그러나 이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해
당 소비자는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유통업체에서 주민번호 확인으로 부도수표에 대한 위험성을 막기보다는 주민번호 기재 없
이 수표번호 조회 등을 통해 부도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이라며 "무심코 수표에 기입한 주민번호가 개
인정보 유출의 통로로 악용될 수 있는 만큼 불필요한 주민번호 배서를 막을 수 있는 제도개선이 필요하
다"고 지적했다.

유통업체와 재래시장 상인들은 수표에 주민번호 배서를 요구하는 걸 탓하기 이전에 제도적으로 부도수표
를 확인할 수 있는 간편한 장치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대문상가에서 장사를 하는 윤철영
씨는 "우리 같은 재래시장의 소규모 상인의 경우 실시간으로 수표조회를 하기 어렵다"며 "주민번호를 적
지 않고도 부도수표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간편한 수표 조회기를 정부에서 공급해줬으면 한다"고 밝혔
다.

이들은 또한 부도수표의 대부분이 10만원권에서 발생되는 만큼 이를 대체할 10만원권 고액화폐를 발행하
는 것도 또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일호 GS리테일 대리는 "지난 한 해 동안 GS수퍼마켓에 접수된 도난수표는 200여 건 4000만원에 달하는
데, 이 가운데 대부분은 10만원권 수표가 차지하고 있다"며 "10만원짜리 고액화폐가 수표를 대체할 경
우 주민번호 기재에 따른 개인정보 유출도 방지하고 부도수표의 위험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
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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