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배영대.김형수] 그가 걸어가면 새 길이 생긴다. 한국 진보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박원순 변호
사(사진). 참여연대를 주도한 시민운동의 대부로서, 또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 등 톡톡 튀는
아이디어의 나눔 사업으로 진보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시켜 온 그가 새로운 변신을 시도 중이다. '희망제
작소'(www.makehope.org)라는 재미난 이름의 민간 싱크탱크 발족에 힘을 쏟고 있다.
공식 창립일은 3월 27일. 하지만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사무실을 찾았을 땐 벌써 25명의 석.박사급 상
근 연구원들이 채용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방은 투명유리를 통해 안이 다 보였고, 문도 아예
열어 놓았다. 그는 희망제작소를 '제2의 실학(實學) 운동'으로 규정했다. 그의 직함은 상임이사.
◆ 제2의 실학 운동="희망제작소라는 이름이 낯설다"고 말문을 트자 박 변호사는 기다렸다는 듯 "재미없
는 운동은 운동이 아니다"고 맞받았다. 이름만 재미있는 게 아니라 실속도 구체적 콘텐트로 재미있게 채
워갈 것이라고 했다.
희망제작소는 새로운 형식의 싱크탱크를 지향한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정책'을 개
발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그는 '동네의 얼굴 만들기'사업을 예로 들었다. 동네의 문화와 상징을 만들
어가는 정책을 개발해 지자체에 제공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연구소를 운영할 작정이다.
"작은 것이 중요합니다. 말로는 돌멩이 하나라도 움직일 수 없어요."
'작은 이야기'를 중시하는 이유는 중앙정부 차원의 거대담론이 가져온 낭비적 정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는 의지의 표현이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을 뛰어넘어 실현 가능한 정책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겠
다는 뜻이다. 18세기 조선에서 명분과 관념에 빠진 양반들이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놓고 벌였던 정쟁
의 틈에서 실학이라는 싹이 돋아났듯이, 희망제작소가 '21세기판 실학'의 구심점이 되길 바라고 있다.
"과거의 패러다임과 원칙.비전.정책.습관.생각에서 한 단계 전환하지 않고는 우리가 현재 누리는 세계
10위권 수준도 지탱하기 힘든 시대가 됐습니다. 정부도 시민단체도 언론도 치밀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안 돼요. 과거엔 부패에 반대하고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등의 거대 어젠다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었다면 지금은 아니지요."
◆ 인권변호사서 사회 디자이너로=학생운동에 이어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참여연대 주도)-자선운동가
(아름다운 재단 주도)로 이어진 그의 직업 변천사가 이제 종착점에 도달한 것일까. 그는 스스로 '사회
디자이너'로 불리길 원했다.
"지난 10여 년간 적지 않은 해외 경험을 쌓은 것도 소위 잘 사는 나라들이 우리와 구체적으로 다른 것
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지나온 길과 희망제작소가 펼쳐갈 새 길을 비교하며 새로운 작업
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하고 생각하다 보니 '사회 디자이너'가 떠올랐고,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직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희망제작소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갑자기 달려든 사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희망제작소는 지
금까지 해온 모든 일의 결산이라 할 수 있다"며 "최근 진보 진영의 지식사회에서 제기되는 위기의식과
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동의하고 찬사를 보낼 때쯤 되면 흥미를 잃습니다." 참여연대의 투명
성 확산 운동과 아름다운 재단의 자선 운동이 국민적 호응 속에 빠른 속도로 수용돼나가자 흥미를 잃게
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희망제작소가 우리 사회에 희망의 산소를 공급하는 엔진으로 자리잡
게 될 무렵 그가 또 변신할 것인지 궁금하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