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06-02-16 15:28]
남해에서는 바다가 마늘밭이 되고 마늘밭이 바다가 된다. 촘촘한 등고선을 그리며 설흘산을 내려온 마늘
밭이 바닷가 밭두렁에서 거친 호흡을 고른다. 앵강만에서 솟은 해가 평생 마늘종을 뽑던 등 굽은 어머니
의 깊은 주름처럼 밭두렁에 짙은 그림자를 그린다. 순간 몽돌해안을 건너온 바닷바람이 초록빛 마늘밭에
서 춤을 춘다. 마치 주름지고 못 박힌 어머니의 투박한 손을 어루만지듯….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초록빛 파래에서 향긋한 봄 냄새가 난다.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연결하는 남해대교는 봄이 오는 길목. 노량해협
을 가로지르는 남해대교의 북단에서 해풍에 파래를 말리는 아낙의 투박한 몸놀림이 봄을 어루만지듯 정
겹다.
남해도와 창선도로 이루어진 남해군은 모양새가 나비를 닮았다. 혹자는 창선교와 창선·삼천포대교로 연
결된 창선도가 본섬인 남해도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남해사람들은 무릎을 세운 어머니(남해도)
가 아기(창선도)를 어르는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나비 날개의 가장자리를 따라 달리는 남해의 해안도로는 동백나무 가로수가 멋스런 드라이브 코스다.
동백꽃이 피기는 아직 이른 철인가. 19번 국도변에 위치한 관음포 이충무공 전물유허지의 동백나무는 꽃
망울만 잔뜩 부풀었다. 이순신 장군은 동백나무 우거진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적의 총탄을 맞은 직후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말을 남겼다.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수군들의 피로 물들었기 때문일까. 관음포의 동백꽃은 유난히 핏빛처럼 붉기로 유명하다.
바다 건너 광양제철소와 여수산업단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77번 해안도로는 야화가 아름다운 곳. 형형색
색의 불을 밝힌 공장 굴뚝과 가로등,그리고유조선 불빛이 마치 남해 망운산 철쭉과 여수 영취산 진달래
를 시샘하듯 밤마다 꽃으로 피어난다.
마늘의 고장답게 남해는 한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는다. 남해 마늘밭은 다랑논으로 유명한 가천에서
절정을 이룬다. 금방이라도 바다를 향해 굴러 내릴 듯 바닷가 절벽 위의 마늘밭에서 밭일을 하는 아낙들
은 빛바랜 앨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풍경.
‘하오의 바닷바람에 온몸을 출렁이는 마늘밭/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종을 뽑는/할머니 일생을 솨르륵 솨
르륵 읽고 있다/밀물과 썰물 소리를 내던 검푸른 시간/그 추억의 손목을 잡아당기면/해수병 앓는 영감이
나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성큼성큼 졸랑졸랑 걸어오던 시절도 보이리라/…’(배한봉 시인의 ‘남해 마늘
밭’ 중에서)
설흘산 아래의 가천다랑이마을에서 홍현마을에 이르는 해안관광도로는 드라이브하는 재미가 듬뿍 묻어난
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는 낚싯배들이 한가롭고 구름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은 바다에서 황홀한 빛의 잔
치를 펼친다.
마늘밭은 호수처럼 조용한 앵강만을 마주한 홍현리 마을에서 더욱 파릇파릇 생기가 돋는다. 바다가 앵무
새처럼 예쁘다고 해서 특이한 이름을 얻은 앵강만은 노도를 품고 있다. 노도는 구운몽의 작가인 서포 김
만중이 생을 마친 마지막 유배지. 김만중은 섬 속의 섬인 노도에서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 등을 집필했
다.
해안도로는 독살이 아름다운 신전마을을 기점으로 나비의 오른쪽 날개를 달린다. 노도행 낚싯배가 드나
드는 벽련마을을 내려다보며 남해의 금강으로 불리는 금산 자락을 에두르면 상주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
장의 쓸쓸한 풍경이 차창을 스친다.
온갖 해산물이 집합하는 미조항은 남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린다. 이곳에서 물
건방조어부림까지 이어지는 해안관광도로는 롤러코스트 코스. 해안선을 따라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좌
우로 굽어 돌 때마다 아담한 포구가 펼쳐지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손바닥만한 마늘밭이 펼쳐진다. 햇살
에 반짝이는 물비늘과 동백나무 잎,그리고 마늘밭의 반사광이 눈을 부시게 한다.
해오름예술촌과 독일마을 사이의 물건방조어부림은 해안가에 조성된 방풍림. 반원형을 그리는 1만여 그
루의 울창한 수림이 이른 아침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그리는 몽환적 분위기의 실루엣은
한 폭의 그림이다..
원시어업의 한 형태인 죽방렴으로 유명한 창선교에서 창선도의 왼쪽 해안을 따라 달리는 해안도로는 봄
과 겨울의 경계선. 눈높이로 펼쳐지는 마늘밭과 바다 건너 하얀 고깔모자를 쓴 지리산 천왕봉이 봄이 그
리운 듯 남해바다를 응시한다.
남해=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