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그대로 나뭇가지에 멈춰 꽃이 된다. 하늘이 만든 백색화다. 풋풋한 사
랑을 나누는 젊은 연인. 눈꽃을 보기 위해 열차에 몸을 싣는다.
“장갑 가져왔어? 오늘 상당히 춥다던데.”(재혁)
“챙겨 왔지. 근데 우리 오늘 진짜 눈꽃 볼 수 있는 거야?”(령)
갑작스럽게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흰색으로 변해버린 지난 10일. 서울 용산역에서 만난 장재혁(28·연
세대 대학원 화학공학과·오른쪽), 김령(24·여·연세대 토목공학과)씨 커플. 모처럼만의 여행에 들떠
있다. 재혁씨가 계획한 이번 여행은 설화가 활짝 핀 전북 덕유산행 눈꽃열차 타기. 대학 졸업과 취업을
앞둔 연인에게 추억 만들기로는 이만한 게 없다.
오전 8시25분. 연인을 태운 KTX는 용산역사를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회색빛 도시가 흰 눈으로 덮여 있
다. 설경을 차창밖으로 내다보며 령씨가 즐거워한다. “기차를 타니까 진짜 여행 가는 기분이 드는
데.”
1998년 철도청(당시)이 청량리역에서 출발해 태백선 추전역과 영동선 승부역을 한 바퀴 도는 환상선 눈
꽃열차를 운행하기 시작한 지 8년째. 어느새 눈꽃열차는 겨울의 대표적인 여행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열차는 눈 덮인 산과 들을 뚫고 달린다. 1시간쯤 달렸을까. 벌써 서대전역이다. 두 사람은 덕유산 국립
공원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눈길을 1시간 정도 간다. 기차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눈앞에 덕유산 국립
공원이 펼쳐진다. 전북 무주군 설천면 무주리조트. 온통 눈천지다. 덕유산의 주봉인 향적봉(해발
1614m) 턱밑까지 곤돌라로 오른다. 무주리조트 내에 설치된 관광곤돌라에서 보는 세상은 눈이 시리다.
푸른색이던 나무와 숲은 흰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속세를 벗어나 선계로 접어드는 기분. 두 사람은 감
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곤돌라를 탄 15분이 짧다.
곤돌라 승강장에서 항적봉까지는 왕복 1시간 정도 걸리는 눈꽃 등산로가 있다. 여행의 절정. 한라산, 지
리산 같은 높은 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구상나무를 비롯해 철쭉, 층층나무, 백당나무마다 피어 있는 흰
눈꽃과 상고대(나무나 풀에 눈처럼 얼어붙은 서리)를 감상하면서 산책길을 거닐다 보면 도시의 찌든 때
까지 맑게 정화된다.
눈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호수처럼 깊고 앵두처럼 빨간 애인보다 예쁠까. 재혁씨는 디지털카메라로 령
씨의 사진을 찍는다. 눈꽃은 배경이다. 령씨도 싫지 않은 듯 깜찍한 포즈를 취한다.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 위로 바람에 날린 눈가루가 느릿느릿 내려앉는 모습이 동화처럼 아름답다. 두 사람은 미끄러운 눈
길에 연방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동심으로 돌아간 듯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1시간30분 정도를 눈밭에서 보낸 두 사람은 곤돌라 승강장으로 돌아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
는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제 산을 내려가면 또다시 도시의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가게 될 것
이다.
“오늘 여행 어땠어?”(재혁)
“불과 몇 시간 만에 도시를 벗어나 푸른 하늘과 흰 눈밖에 없는 곳에 서 있으니 꼭 꿈을 꾸는 것 같
아.”(령)
아쉬움을 뒤로하고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는 길. 나란히 창밖의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
이 아름답다.
향적봉에서 내려와 오후 6시57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기차에 오르자마자 두 사람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곤히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꿈 속에서 다시 만나 눈밭에서 뛰어놀고 있을까.
글 박진우, 사진 황정아, 그래픽 김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