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싣고 낭만이 달린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5-03-26 오전 10:33:00
서울야경열차

매주 금요일 KBS2 TV의 ‘TV정보센터’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주말여행 정보를 안내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4개월째다. 방송국을 드나들면서 아나운서, 프로듀서, 구성작가 등 사람들을 만
날 때마다 한결같이 받는 질문이 ‘봄꽃 여행을 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 다만 몇시간이라도, 말 그대
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이 없을까’이다. 이런 주문을 적잖이 받았던 동료 여행작가 송일봉씨는 자신
의 여행책자 제목을 ‘이번 주말엔 어디 가면 좋을까’로 지었고, 허시명씨는 ‘우리 주말에 뭘 하고 놀
까’로 짓기도 했다.

이제는 잘 놀아야만 주변 사람이나 가족에게 환영받는 시대다. 21세기의 가장들은 ‘휴(休)테크’ 또는
‘놀테크’에 관해서도 일가견을 이뤄야 여러 사람으로부터 대접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주말이 아니라 주중에도 3시간 정도만 짬을 내면 낭만적인 시간을 즐길 수가 있으니, 그 해답의 열쇠는
기차가 쥐고 있다. 이름하여 ‘서울야경열차’. 이제부터 원웨이 티켓을 들고 서울 도심과 근교의 어둠
을 은하철도999처럼 돌아보자. 여행 중에서도 기차여행이란 단어만큼 낭만적인 것도 없지 싶다. 대중교
통편이 변변치 않던 시절, 고향마을이나 외가에라도 가려면 기차를 타야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때
문일까. 또는 ‘철도원’ 같은 영화의 명장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까.

지하철에서 내려 야경열차 탑승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당신은 그리스의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가 부르는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콧노래로 흥얼거려도 좋다. 아그네스의 애잔한 목소리와 민속악기 부주
키의 서정적 연주는 비장감마저 들게 한다. ‘카타리니행 기차는 항상 8시에 떠나네/ 11월은 영원히 당
신의 기억 속에 남으리/ 비밀을 간직한 당신은 오늘밤 결코 돌아오지 않네/ 기차는 8시에 떠나지만/ 당
신은 카타리니에 홀로 남아 가슴에 칼을 품은 채/ 안개 속에서 시계를 바라보네/ 5시에서 8시까지.’

이름도 잘 지었지, 예전에는 서울교외선이었으나 지금은 서울야경열차다. 서울교외선은 1963년에 태어
나 40년을 조금 넘게 살다가 2004년 5월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여행객들의 향수는 수그러들 줄 몰랐
고 교외선의 뒤를 이어 서울야경열차가 생겨나자 날로 인기가 높아져 예약을 하지 않으면 타기가 어려
울 정도에 이르고 말았다. 40대와 50대는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려고, 30대는 하루쯤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20대는 이색적인 데이트를 체험하기 위해 열차에 오른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7시 15분에 기차는 출발한다. 서울역을 떠나 신촌, 능곡, 송추, 장흥, 의정
부, 청량리를 거쳐 한강변을 지나 용산에서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온다. 맨 앞에서 꽁무니까지 모두 7량
이며 총 좌석수는 198석. 3호실은 이벤트실과 카페로 꾸몄고 맨 뒤칸에는 유리 칸막이가 달려 아늑한 느
낌을 주는 별실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서울 근교의 야경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실을 달았다. 일반 객실
이라고 해도 좌석간의 거리가 널찍하고 이벤트실의 행사를 중계하는 모니터가 달려 있다. 깔끔함으로 치
자면 호텔 뺨치는 화장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서울역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네온사인이 화려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면 2층 무궁화호 탑승장 입구에 여
행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출발시간이 임박해지면 여행사 직원이 기차까지 안내한다. ‘사랑’ ‘꿈’
같은 예쁜 언어들이 깔끔한 디자인으로 기차 외부를 장식하고 있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지
정석에 앉은 여행객들은 서울역의 화려한 조명을 감상하면서 샌드위치 등 미리 준비한 간식으로 저녁 끼
니를 대신한다. 미처 간식을 준비하지 못했어도 차내에서 삶은 계란이며 사이다, 맥주 등을 이동수레에
싣고 다니며 팔기도 하니 걱정할 일이 못된다.

드디어 7시 15분,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가슴은 아이들처럼 콩닥거린다. 결
혼기념일을 맞은 노부부, 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일가족은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연인들은 다정하게 손
을 잡고 여고 동창생들은 오랜만의 해후가 즐거워 수다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기차에는 칵테일과 마술, 그리고 음악이 실려 있다. 화려한 서울역의 야경을 뒤에 남기고 열차가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하면 빨간 유니폼의 승무원들이 음료나 간식을 서비스한다. 이어서 8시가 되면 장내 방
송이 흘러나온다.

“3호실 이벤트칸에서 1시간 가량 매직쇼와 낭만의 라이브 콘서트가 벌어질 예정이니 가셔서 화려한 외
출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곳으로 이동하기 귀찮은 여행객들은 그냥 제 자리에 앉아서 실내 모니터를 통해 중계되는 마술과 공연
을 감상한다. 돗자리와 간이의자가 깔려 있는 이벤트실에서 얼굴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가 않다. 젊은 마술사는 카드마술에서부터 보자기마술, 물컵마술, 동전마술 등 다양한 손놀림으
로 관람객들을 유쾌하게 만든다.

뒤를 이어 기타를 멘 가수가 등장하면 여행객들은 노래를 청하고, 함께 부르고, 손뼉을 치며 하나가 된
다. ‘여행을 떠나요’랄지 ‘사랑이여’ ‘만남’ 등이 애창곡이다. 무도회장 같은 조명이 분위기를 한
껏 달군다. 이 시간에 어떤 이는 무대 앞으로 초대돼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어떤 이는 3년 만의 재회를 자축하는가 하면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이벤트홀에서 열리는 라이브 공연
은 나이든 사람들을 20대 청춘으로 돌려놓고 젊은 커플을 하나로 단단히 묶어준다.

기차가 반환점인 의정부역을 돌아 응봉역에 접어들 무렵이면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약간의 조명등만 남
긴 채 객차의 불이 일제히 꺼진다. 살며시 연인의 손을 잡건, 입맞춤을 하건 그것은 그들만의 선택이
다. 일부 여행객은 맨 뒤칸의 전망실이나 복도로 이동,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며 짧은 여행을 아쉬워한
다.

출발지였던 서울역으로 되돌아오는 시각은 9시40~45분이다. 또 하나의 추억과 사랑을 쌓은 승객들은 2시
간 30분의 기차여행이 아쉽다는 듯 연신 뒤를 돌아보다가 서울의 밤거리로 흩어진다. KTX는 빨리 가야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지만 이 열차는 다른 기차들의 통과를 위해 간간이 멈춰서서 기다려주기도 한다.
어차피 오늘 안에 집에 들어가면 되는 것을 서둘러서 무엇하랴.

이 열차는 매주 금·토요일이면 서울~하동간 관광전용열차로 탈바꿈한다. 드라마 촬영지인 악양면 최참
판댁, 화개장터, 쌍계사 등을 방문하는 것이다.

예약문의 KTX 관광레저 02-393-3100.

[글·사진 유연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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