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갠 날, 구릉 뒤덮은 가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9-17 오후 1:58:00
◇고창 학원농장 메밀밭


고창땅은 언제 찾아가도 정겹다. 천년고찰 선운사와 도솔암 숲길은 그윽하다. 산비탈을 한 굽이 돌면
넉넉한 구시포 앞바다가 펼쳐진다. 이맘 때의 선운산에는 꽃무릇도 무더기로 피어난다. 봄의 신록과 여
름 바다, 가을 단풍, 겨울 설경까지 사계절 모두 만족을 주는 곳. 올해는 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산그늘에 무서리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메밀꽃. 초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제격이다.


메밀밭이 들어선 곳은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이다. 봄에는 푸른 보리로 넘실댔던 밭고랑에 이
젠 메밀꽃이 만개했다. 젖무덤처럼 완만한 구릉은 청보리만큼이나 짙푸른 하늘을 이고 있다. 메밀밭은
마치 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대를 보고 있으면 꽃멀미를 할 것같이 어지럼증이
난다.

올해 조성된 메밀밭은 학원농장 17만평 중 4만여평. 비록 농장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메밀밭을 한번 돌
아보는데 30분 이상 걸릴 정도로 드넓다.


메밀밭에서는 다른 식물들을 찾아볼 수도 없다. 파종부터 재배까지는 불과 두달뿐이지만 워낙 번식력
이 강하기 때문에 잡초조차 끼여들지 못한다. 메밀밭 바로 옆의 콩밭에 잡초가 무성하게 올라온 것과
대조적이다. 붉게 익은 수숫대가 물고랑을 따라 댓그루씩 서서 메밀밭의 경계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밭고랑 한가운데 아득하게 보이는 수십년 묵은 소나무 세 그루는 밭고랑이 얼마나 드넓은지 짐작하게 해
준다.


메밀꽃밭은 순백으로 환하다. 한송이를 떼어내 놓고 보면 마치 강냉이 튀밥처럼 보잘 것 없지만 들판
을 뒤덮고 있는 메밀꽃은 눈 쌓인 들판 같다.


‘내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슴슴한 눈물도 씻어내리고/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
운 피의 심장도/말갛게 씻어 준다//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 산비탈에 엎질러져서/둥둥 떠내려오는 소
금밭/아리도록 저린 향내/먼산 처마끝 등불도 쇠소리를 내며/흐르는 소리…’(송수권의 ‘메밀꽃밭’)


학원농장의 메밀꽃은 9월초부터 피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까지 메밀꽃이 이어진다. 꽃머리부터 피기 시
작해서 폭죽 터지듯 꽃대를 타고 내려오며 꽃망울을 터뜨린다. 농장주 진영호씨(55)는 “올해 장마로
파종이 늦었기 때문에 강원도 봉평보다 1주일 정도 늦게 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진씨는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장남. 대기업에서 이사까지 지냈지만 이제는 농군 티가 완연하다. 학원농
장은 어머니인 이학 여사(83)가 처음 개간했다고 한다. 1960년대엔 이런 곳에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했을 정도로 잡목만 무성했던 야산. 마을 사람들이 땔감이나 얻었던 불모지를 사서 개간했다. 원래 두
루미가 많이 날아들던 곳으로 황새골이라 불렸다. 학원(鶴苑)이란 이름도 학이 많다는 뜻이다. 어려서
부터 농군이 꿈이었던 그는 92년 사표를 쓰고 들어와 농군이 됐다.


원래 학원농장은 보리밭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보리밭은 개인농장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컸다. 진씨는
몇해 전부터 메밀을 조금 시험재배하다가 올해는 4만평으로 늘렸다. 이곳에서 수확한 메밀은 가공공장
이 많고, 업체도 많은 봉평으로 팔려나간다. 성장이 빠르고, 김을 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따로 일손
이 필요없다. 진씨는 판매처만 확보되면 13만평의 농장 전체에 메밀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전국 최대의 메밀꽃밭으로 봉평만큼이나 명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비산비야의 구릉지대에
펼쳐진 학원농장 메밀밭은 지평선이 하늘과 바로 맞닿은 듯 정겹다.


선운산에서는 꽃무릇을 볼 수 있다. 꽃무릇은 꽃과 잎이 따로 피는 까닭에 상사화로도 불린다. 꽃무릇
은 선운사 들머리 개울가부터 피어 있다. 고창군청에서 조성한 꽃밭. 굽은 것 하나 없는 꽃대, 왕관처
럼 벙그는 꽃잎, 황금빛 수술을 매달고 있는 꽃술. 뚝뚝 쪽물이 떨어질 것 같은 파란 활엽수 아래 붉
은 꽃밭이 대조를 이룬다.


상사화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먼 옛날 토굴에서 용맹정진하던 스님이 있었다. 어느날 불공을 드리
러 온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스님은 가슴앓이를 하다가 결국 상사병으로 쓰러졌고, 그 자리에
서 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 꽃이 바로 상사화라고 한다. 절 주변에 상사화가 많은 것은 스님들이 탱화
를 그릴 때 상사화로 물감을 만들었기 때문. 상사화 뿌리를 짜낸 즙을 칠하면 좀이 슬지 않고 색도 바
래지 않는다고 한다.


상사화는 도솔천 길을 따라 도솔암으로 이어진다. 숲그늘 짙은 도솔천 물그림자에 비친 꽃모습이 환상
적이다. 마치 초파일 연등을 달아놓은 듯 길이 환하다. 백제 위덕왕 때인 577년 세워진 선운사, 동학
의 비기를 꺼냈다는 마애불,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수령 600년의 장사송을 볼 수 있다.


볼거리 가득한 고창땅. 하얀 메밀꽃과 붉은 상사화가 꽃향기를 내뿜으며 가을을 불러들인다.


◇여행길잡이


학원농장을 찾아가는 길은 조금 복잡하다.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빠지자마자 3거리에서 법성포 방
면으로 우회전하면 15번 지방도. 5분 정도 달린 뒤 3거리 갈림길에서 선운사 대신 무장 방면으로 좌회
전한다. 다시 만나는 공음(무장)·동호 3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무장 방면 796번 지방도. 무장읍내 6거
리에서 공음 방향으로 꺾어 4㎞를 달리면 계동 버스승강장이 있다. 그 옆에 한자로 쓰인 ‘학원농장(鶴
苑農場)’ 돌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이 크지 않아 지나치기 쉽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정읍
IC에서 빠져 22, 23번 국도로 고창읍에 들어가거나, 백양사IC로 나와 15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고창읍
에 닿는 방법이 있다. 대중교통은 서울 강남 센트럴시티에서 고창까지 고속버스를 탄 뒤 군내 버스로
무장까지 간다. 무장읍내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6,000원 거리. 학원농장 (지역번호 063)564-9897.


학원농장에 객실 5개가 있다. 4만원부터. 선운사 관광단지에 숙박시설이 많다. 석정온천(564-4441)
은 게르마늄 온천으로 피로를 씻기 좋다. 선운사 입구의 풍천장어가 고창의 으뜸 먹거리. 연기식당
(562-1537)은 29년째 풍천장어를 판다. 예전엔 갯벌가의 허름한 집이었는데 몇해전 새로 지었다. 고
창읍내 천변의 조양관(508-8381)은 이름난 한정식집. 문을 연지 60년이 넘는다고 한다. 7,000원, 1
만5천원, 2만5천원짜리가 있다.


메밀밭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무장읍성이 있다. 갑오농민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곳. 고부에
서 봉기했던 농민군이 자진 해산하자 관군은 약속을 어기고 동학교도들을 잡아들였다.


전봉준은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과 태인의 김개남, 원평의 김덕명 등과 함께 1894년 무장에서 거병했
다. 무장읍성은 4,000명의 농민군이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아 백성을 살려내자는
창의문을 쓰고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던 현장이다.


18일부터 4일동안 선운산 일대에서 풍천장어와 꽃무릇축제를 연다. 고창군청 560-2225, 선운산도립공
원 563-3450. 우리여행사(02-733-0882)는 20일 고창 메밀밭과 꽃무릇 여행을 떠난다.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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