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가을이 오는 소리 들어보렴…경남 사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8-26 오전 9:53:00
시나브로 여름이 다 갔다. 한 차례 세찬 비가 쏟아지니 바람도 한결 선선하다. 이렇게 또 계절갈이가
시작되고 있다. 여름 다음에는 가을이라고 했나. 포도밭이 먼저 새로운 계절을 맞고 있다.

휴가철이 끝났다는 사실은 고속도로에서 먼저 깨달을 수 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부산에서 경남 사천
까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뻥뻥 뚫린 느낌을 좇아 오랜만에 고속도로 끝까지 내달려보고 싶건만
아쉬움을 접고 사천 나들목으로 내려선다.

나들목과 연결된 도로는 3번 국도. 사천만을 따라 길게 남북으로 뻗은 국도는 삼천포항을 살짝 스치며
최근 개통된 창선·삼천포대교로 이어진다. 이를 건너면 남해군이다. 하지만 잠시 용현면 남양동에서
모충공원 푯말을 따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예상한대로 도로 양편은 색깔을 달리하는 밭떼기로 줄을 이었다. 검푸른 포도와 누런 배. 어쩌면 서로
어울리지 않을 듯한 색조. 하지만 가지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열매에서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히 실감할 수 있다.

사천만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포도밭은 모두 6ha. 43가구가 매년 300여t을 생산하고 있다고 사천시청
은 설명한다. 이 곳에서 수확되는 포도는 거봉과 캠벨 등 두 종류. 거봉은 내달 추석 무렵에야 제대로
단맛을 내지만 캠벨은 벌써 달콤새콤한 맛이 배어나온다.

사천 포도는 당도가 높기로 소문났다. 모래가 뒤섞인 흙땅이 빗물을 쉽게 흡수하는데다 타지역에 비해
많은 일조량과 해풍도 당도를 높이는데 한몫을 하기 때문이다. 한때 서울과 제주까지 우송됐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이런 명성 덕분인지 지금은 아예 외부로 내보내는 포도가 없다. 애써 공판장을 통해 판매하지 않아도
외지 사람들이 직접 과수원에 찾아와 상자째로 사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요즘은 포도밭마다 널찍
한 평상과 주차장을 설치해두고 있다.

'포도를 꼭 사야될 이유는 없어…그냥 식구끼리 도시락을 싸와 평상에 걸터앉아 나눠먹으면서 사천포도
가 어떻게 생겼는지 넝쿨도 만져보고 직접 따서 맛보면 되지 뭐….' 해변농원 박시종(51)씨의 말이
다. 실제로 포도가 넝쿨을 감으며 요즘처럼 짙푸른 색을 띨 때면 인근 유치원과 학교 등에서 수백명씩
단체로 찾아온단다.

기껏 사가봐야 모두 합쳐 2만~3만원. 하지만 어린 놈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포도넝쿨 사이로 노는 모습
을 보면 그냥 기쁘다고 한다. 값싼 칠레산 포도가 곧 시중에 쏟아지면 그나마 사천포도의 명맥도 끊어
지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담긴 듯하다. 실제로 절반 가량의 포도밭이 최근 참다래(키위)밭으로 바뀌고
있고 박씨도 지난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됐을 때 반대 시위를 하러 수시로 상경했다고 한다.

포도밭 끝자락은 갯벌 바다와 곧바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천 포도밭의 전경은 더욱 한가로
운 맛을 우려낸다. 사천만의 고요한 물결 위로 페인트칠이 벗겨진 선외기가 외롭게 떠 있는 모습만으로
도 풍경인데,피서객이 빠져나간 자갈갯벌 해변에는 게들이 뒤늦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삼천포항까지는 10분 남짓. 포장도로 너머로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양을 바꿔가며 자
동차의 꽁무니를 따라온다. 저도 마도 신도 늑도 초양도 등. 늑도와 초양도는 창선·삼천포대교의 징금
다리 역할도 한다.

삼천포항은 해변도로와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수백척의 어선과 쥐치 공장이 항구를 가득 메우던 옛 영
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항구 특유의 시끌벅적함이 남아 있다. 쥐치는 이제 국산은 거의 없
고 비싸다. 대부분은 베트남산이다.

삼천포 시내에서 바다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언덕이 노산공원.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산책로가 흡족하
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팔각정에 오르면 삼천포항과 시가지를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바다 속으로 코
를 담그고 있는 남일대의 코끼리바위도 여기서 한달음이다.

사천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이틀 이상의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와룡산이나 봉명산 산행을 하는데 한나
절이 걸리고 다솔사와 백천사 비토섬 등의 동선이 제법 길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1시간30분에서 6시간
대까지 코스가 다양하며 등산지도는 백천사 입구의 관광안내소에서 얻을 수 있다.

차밭으로도 유명한 다솔사는 사천 나들목보다 곤양 나들목으로 내려서는 것이 좋다. 곤양나들목에서 15
분 거리에 있으며 자동차로 사찰 입구까지 갈 수 있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다면 와룡산보다 다솔사 옆
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걷는 봉명산 산행이 더 어울린다.

여기서 남쪽의 서포면으로 20여분을 내려오면 토끼의 간을 둘러싼 거북이와 토끼의 잔꾀를 들을 수 있
다. 이른바 '비토섬'. 이름 그대로 날아가는 토끼의 형상이다. 연륙교가 설치돼 자동차로 이어갈 수
있으며 전설의 주인공인 토끼섬과 거북섬,목섬 등이 바라다보이는 곶까지 닿을 수 있다. 도로는 바다
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아무데라도 자동차를 세워 앞을 바라보면 그 자체가 그림엽서나 다름없
다. 어슴푸레 섬을 가린 안개가 묵화처럼 그려지고 조개밭의 영역을 표시한 대나무 꼬챙이조차 풍경으
로 들어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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