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에 서면 천년의 내력 밀물처럼 밀려오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8-20 오전 10:34:00
◇경주 절터-감은사지·황룡사지·장항리 절터


경주는 빛바랜 사진 속에 남아있는 도시다. 수학여행, 단체여행으로 경주에 가서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하나 없는 이가 몇이나 될까. 덕분에 경주는 수학여행의 도시, 현재성을 상실
한 퇴색한 도시로만 기억된다.


그러나 ‘천년 고도’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으로만 대표되는 곳이 아니다. 왕국의 고도에는 다양한
시대가 빚어낸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철철 넘쳐난다. 그 가운데 신라의 고도, 경주의 면모를 보기에 가
장 적당한 곳은 절터일 것이다. 절터로 떠난다. 황량하고 쓸쓸하지만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만의 상상이 가능한 곳, 시각이 사고를 제한하지 않는 곳. 빈 것이 내어놓는 아름다움을 찾아서.

경주의 절터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노을 질 무렵의 감은사지를 꼽는다.
그러나 해질 무렵의 황룡사지가 주는 감흥은 감은사지 못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크다. 장대한 절터
가 선사하는 웅대함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마력에 빠지기엔 황룡사지가 제격이다. 그 빈 터의 아름다움
은 한낮이 아니라 해질 무렵에 찾아야만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분황사 앞으로 뻗은 작은 오솔길을 지
나 황룡사지로 들어선다. 옥수숫대가 키 높이 솟고 호박넝쿨이 우거진 길을 지나 펼쳐진 드넓은 벌판에
는 거칠 것이 없다. 푸른 잔디밭에는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다. 빈 절터엔 호젓하게 거닐며 사색에 잠기
거나 금당 자리 초석에 기대 앉아있는 이들 서넛뿐이다.


동서 288m, 남북 281m로 무려 3만여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는 호국사찰로 진흥왕 14년인 533
년 처음 공사가 시작됐다. 늪지였던 이곳에 흙을 퍼다 땅을 다지고 담장을 완성하는데 17년이 걸렸다.
진흥왕 35년(574)에 구리 3만여근과 황금 1만1백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륙상을 세우고 동양 최대
의 목탑인 9층 목탑, 에밀레종보다도 규모가 4배 더 나간다는 황룡사종 등을 모두 만들어 사실상의 불
사가 끝나기까지는 200여년이 걸렸다.


황룡사지를 거닐다 보면 신라인들의 스케일에 놀란다.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터에는 불상을 올려놓는 커
다란 석조대좌가 남아있는데, 가운데에 홈을 파 길이가 6척(약 4.8m)에 달하는 금동장륙상을 안치했
다고 한다. 바닥에 네모 반듯한 초석이 64개나 놓인 9층 목탑터는 더욱 놀랍다. 서라벌 땅 어느 곳에서
도 우러러볼 정도로 높았다는 9층 목탑은 우리나라 최대, 동양 최대의 불탑으로 불상보다 탑을 더 중요
시 여기던 당시의 종교관을 보여준다. 탑의 각 층은 외적을 상징했다는데, 기록에 따르면 바닥면적만
150여평으로, 높이는 무려 80m에 달했다고 한다. 황룡사 금동장륙상과 9층 목탑을 하늘이 내렸다는
옥대와 더불어 신라 때 3대 보물로 여겼을 정도로 황룡사는 호국사찰로서 가지는 상징성은 큰 사찰이었
다. 결국 황룡사탑은 이를 두려워 한 몽고군에 의해 1283년 화재로 가람과 함께 전소됐고, 유물은 임
진왜란 때 왜인들에 의해 파헤쳐졌다.


목탑터 너머 절의 중문 근처 한쪽에 1970년대 후반 발굴작업을 하면서 절터에 나뒹굴던 석재를 모은 곳
이 있다. 황룡사 곳곳에 쓰이던 주춧돌과 맷돌, 문설주 사이로 이끼와 잡초가 무성하다. 다듬다 만 석
재와 세월에 닳은 석재들에 찬란했던 왕국의 흥망성쇠가 스쳐 지나간다. 연꽃무늬를 새기다 만 주춧돌
이며, 수세식 변기와 세숫대야 등 신라인들의 참신함이 엿보이는 유물도 발견할 수 있다.


황룡사지와 더불어 장항리 절터와 감은사지를 아름다운 절터로 꼽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토함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굽이친 산자락을 따라 가다보면 산자락에 삐죽이 탑이 솟은 곳이 바로 장항리 절
터. 이곳은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정양모 선생이 에밀레종소리, 진평왕릉과 더불어 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세 가지로 꼽은 곳이다. 비좁은 계곡을 지나 계단을 밟고천천히 오르면 양지바른 산중
턱에 살구빛 화강암으로 만든 탑 2기와 금당터가 나타난다. 도괴범에 의해 탑이 폭파된 후 그 잔재를
쌓은 동탑에는 지붕돌만 남아 있고, 서쪽탑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인왕상이 조각돼 있는데 묘사가
섬세하고 활기차다. 불상을 받치고 있던 연화대좌에도 신화 속 동물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있던 잘생
긴 석조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다.


감은사지는 노을 질 무렵 찾아야 제맛이다. 금당터에는 큰 돌을 깔고 그 위에 긴 장대석을 걸쳐놓고 다
시 주춧돌을 놓은 독특한 구조로 장대석 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감은사는 신라통일의 위업
을 달성한 문무왕이 왜구의 침입까지 막아내겠다고 지은 호국사찰로 신문왕 때 완성됐다. 감은사 동서
탑은 빼어난 장식은 없지만 엄숙하고 무게감이 있다. 탑 꼭대기에 쇠로 만든 긴 찰주가 꽂혀있어 총 높
이는 13m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문무대왕수중릉과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받았
다는 이견대, 자갈돌 구르는 소리가 아름다운 봉길해수욕장이 지척이다.


서쪽 하늘 너머로 해가 진다. 마침 황룡사지를 찾은 아이들이 9층 목탑터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몽고군
이 탐을 내, 자국으로 갖고 가려다 감포 앞바다 부근에서 문무왕의 화신인 호국룡을 만나 대종천으로
가라앉았다는 황룡사종이라도 울려퍼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풀밭에 앉아 마음속으로 한층 한층 탑을
지어 올리며 소원을 빌어본다. 귓가에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던 신라인들의 기도 소리가 환청처럼 울
려퍼진다.


여행길잡이


경부고속도로 경주IC를 이용한다. 감포로 빠지는 국도 4번과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 언양으로 이어
지는 35번 국도에 유적지가 산재한다. 대중교통은 서울 및 청량리~경주간 기차가 하루 7편, 서울과 경
주를 연결하는 고속버스가 하루 27회,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비행기는 울산이나 포항 공항을 이용
한다. 경주역(054-743-4114), 경주고속버스터미널(741-4000). 경주시내에 보문단지를 연결하는
버스가 자주 있다. 터미널~분황사~보문단지~불국사~경주역을 잇는 10번과 11번 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터미널~보문단지~감포, 양남, 암곡을 잇는 18번, 100번, 150번 노선은 15분 간격으로 다
닌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743-5599), 경주시관광안내소(772-9289).


보문호 주변에 특급 호텔들이 몰려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입장권을 제시하면 코오롱호텔
(746-9001), 콩코드호텔(745-7000)은 30%, 경주 힐튼(745-7788)과 호텔 현대(748-2233)는 주
중 40%, 주말 30% 할인해준다. 경주교육문화회관(745-8100)은 주중 50%, 주말 40% 할인. 불국사
주변과 감포, 노서동 일대에 장급 여관이 몰려 있다.


쌈밥과 해장국이 유명하다. 대릉원 동쪽 편 골목 후문쪽에 쌈밥집이 몰려 있다. 배추와 상추, 호박 등
다양한 야채와 양념장, 젓갈, 막장 등이 나온다. 정록쌈밥(775-9333), 구로쌈밥(749-0060), 삼포
쌈밥(749-5776) 등이 유명하다. 1인분에 6,000원. 경주역 부근 팔우정 로터리에 있는 해장국집골목
은 김치 장아찌와 해초, 콩나물, 메밀묵이 양념장과 함께 나오는데 담백하고 소박하다. 팔우정 해장국
집(749-2391). 경상북도 명품으로 꼽힌 황남빵(749-7000)은 경주의 특산물. 올해로 64년째 만들
어 오고 있는 빵으로 팥 앙금으로 소를 만들고 구워내 달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운 게 특징. 25개들이
한 상자가 1만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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