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에게 "씹을 권리"를 허하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8-11 오후 1:37:00
'노인복지' 틀니, 보험적용 왜 안 되나

"부럽다…."

일요일 오후, 엄마와 함께 오랜만에 대중목욕탕엘 간 이진아(32, 가명)씨. 목욕을 마치고 휴게실로 나
와 바나나 우유를 마시던 중 진아씨는 엄마의 탄식 섞인 한 마디를 들었다. 한 구석에서 아줌마 몇몇
이 둘러앉아 금방 버무린 겉절이 김치를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언젠가부터 진아씨네 김치는 '쪼잔해'지기 시작했다. 김치란 모름지기 쭉쭉 찢어먹는 맛도 있어야 할
텐데 밥상에 올라오는 김치는 잘게잘게 썰려 있었다. 진아씨 엄마의 '소화' 수준에 맞춰진 탓이다.

올해 나이 예순 셋인 그녀의 엄마는 부분틀니를 하고 있다. 성한 이가 몇 개는 남아 있어 틀니가 그 이
빨에 걸쳐 있는 상태다. 하지만 성한 치아마저도 틀니의 하중으로 인해 금방 못쓰게 될 터. 이제 그녀
의 엄마도 아랫니 전체를 틀니로 바꿀 때가 된 것이다.

헌데 진아씨의 엄마는 그 사실을 숨겨 왔다. 그 날 목욕탕에서 딸에게 '표정'이 들키지 않았다면 그녀
의 엄마는 언제까지나 이가 아닌 잇몸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녀의 엄마는 자식들에게 틀니를 보이는
법이 없다. "창피하다"고.

"어떻게 그러고 살았어."
"치과에 가니까 200만원 든다고 하더라."
"그래도, 빚을 내서라도 해야지."
"....."

그 동안 엄마의 '씹지 못하는 고통'을 눈치채지 못한 미안함을 진아씨는 그렇게 화풀이하고 있었다. 그
리고 더 남은 미안함은 엄마에게 토마토 화채를 상납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토마토처럼 '여문' 과일은
부담이 없겠지 싶어서.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그 토마토마저도 옳게 씹지 못했다. 얼굴을 기울인채 한
쪽 이로 씹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진아씨는 오빠와 동생을 소집시켰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엄마의 치아상태의 심각성을 알리
고 '계'를 붓기로 했다. 수입에 따라 매달 일정한 액수를 내고 3개월 안에 200만원을 만들자고. 이른
바 '엄마 틀니 재원 마련을 위한 형제계'였다.


노인 3명당 2명꼴 '틀니' 필요

이진아씨의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에 따르면 65∼74세 노인 중 80% 이상이 잇몸병을 앓고 있으
며, 65세 이상 노인인구 중 70%가 의치를 필요로 하거나 장착하고 있다. 3명당 2명이 의치를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저소득층 노인들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2년 전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65세 이
상의 생활보호대상 노인의 평균 치아 수는 9.69개. 그 중 21%는 아예 치아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드러
났다.

또한 틀니를 사용하는 노인중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무면허 의료업자에게 시술을 받은 경우가 43%에 달
해, 이 중 절반이 다시 시술해야 하는 정도의 불편을 느낀다고 한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의치는 더 이
상 질병이 아니라 '장애'나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노인틀니의 의료보험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나왔다. 노인복지 관련 대통령 공약으로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약속이 있었고, 실제로 김영삼 정부 때는 입법안 마련에 여론이 모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간헐적으로 70세 이상 생활보호대상자와 무의탁·독거 노인, 생활보
호시설 수용 노인들을 대상으로 정부와 대한치과의사협회(이하 치협)가 무료틀니사업을 하는 정도에 그
치고 있다. 올해도 보건복지부는 70억 원의 재원을 투자해 치협과 공동으로 1만5000명의 노인들에게
틀니를 선물했다.

하지만 건치의 전민용 대표는 "무료틀니사업은 '노인의치 보험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활용된 측면
이 없지 않다"며 제도개혁과 재원마련을 우선 꼽았다.

틀니 보험화, 누가 반대하나

최근 김희선(민주당. 동대문갑) 국회의원은 대한노인회(안필준 회장)와 공동으로 지난 7월부터 '노인
의치 건강보험 적용' 국회청원을 위해 전국적인 서명작업을 벌이고 있다. 김희선 의원은 "누구나 나이
가 들면 치아의 기능이 약해져 어쩔 수 없이 틀니가 치아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그 비용은 약 수백
만 원대로 일반가정에서는 소화하기 힘든 액수"라며 "무료틀니사업은 그 대상 폭이 너무 좁아 현실성
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틀니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적잖은 비용 때문에 불법시술을 하거나, 그냥 아프
고 불편한 대로 지내는 경우가 있다. 또한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는 불법시술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손해를 봐도 아무런 대책마련도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위험의 부담을 고스란히 안고서도 불법시술을
자행한다."

김희선 의원실에서는 지난달 말 이와 관련해 공청회를 계획했었다. '노인의치 건강보험 적용'을 위한
공청회의 패널로는 건치와 대한노인회를 찬성측 토론자로, 치협과 건강보험공단을 반대측 토론자로 각
각 초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공청회는 열리지 않았다. 의원실측에선 "일정 때문에 연기되었을 뿐"이
라고 설명했지만 의료계에선 "보험화 반대세력의 눈치를 보는 곳이 많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대한노인회의 한 간부는 김 의원과 공동으로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과 관련 "지난 달말 치협의
항의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대표에게 '치과협회는 1만5000명 무료틀니사업도 했고, 또 틀니를 보험화하면 치과의사들의 생
존권이 위협받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단지 김 의원의 요청이 들어와 동의한 수준이고, '틀
니 보험화'에 대해 능동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해 말해줬어요."

덧붙여 대한노인회의 이 간부는 "국회의원이 하는 일은 사실 우리 사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눈치
가 보여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지부 회원들의 서명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평
가했다.

노인들의 '저작(詛嚼)권'을 보호하라

치협이 틀니 보험화에 반대하는 이유는 "낮은 보험수가로 인한 치료의 왜곡"이었다. 치협의 정재규 회
장은 "틀니에 보험이 적용되면 낮은 질의 재료와 사후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틀니가 현재 300∼400만원 정도 하는데 보험을 적용하면 반가격으로 떨어진다. 그 차액을 어떻게 보
험재정으로 감당할 것인가. 더욱이 사용할 수 있는 치아가 남았는데도 다 뽑고 틀니를 해달라고 할 수
있고, 처음 한 틀니가 안 맞는다고 새 틀니로 다시 해달라는 등 치료가 남발될 수 있다. 틀니는 기본적
으로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치료다. 돈 있는 사람은 시장에 맞기고, 없는 사람들은 봉사활동 등으로 혜
택을 주면 된다."

이에 대해 건치의 김용진 사무국장은 "치협의 논리는 의료보험 정책 전반에 대한 부정"이라고 반박했
다.

"현재 의료보험이 되는 모든 치료행위가 다 저질이라는 말인가. 보험수가는 조절하면 된다. 인건비, 재
료비 등을 정당하게 책정하면 의료의 질이 떨어질 이유가 없다.

문제는 당국의 의지다. 보험재정과 국가보조, 지자체 지원 등 재원이 허락하는 수준에서 적용대상을 한
정해, 일단 낮은 수준에서 출발하고 점차로 확대해 가는 방향을 찾으면 된다."

덧붙여 김 사무국장은 "틀니는 일반적인 보건의료서비스가 아닌 장애인을 위한 복지 차원의 접근이어
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의 담당관은 "노인들 틀니는 백혈병, 암환자의 약과 주사제 등에 밀리고 있
다"고 말했다. 복건복지부에 접수되는 민원이 많긴 해도 가격이 비싸고 당장 생명에 직결된 문제도 아
니다보니 틀니는 늘 뒷전이라는 얘기다.

영국·독일 등 유럽의 선진국가들은 정책서비스차원에서 노인의치에 대한 보험급여를 지원하고 있으며,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도 기본재료를 사용한 의치는 보험급여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에겐 너무
먼 얘기겠지만, 노인복지차원에서 보청기·휠체어·돋보기 심지어 지팡이까지 보험적용을 하는 나라도 많
다.

'씹는 즐거움', 즉 '저작(詛嚼)권' 주장도 맘 놓고 못하는 대한민국. 노인들이 안쓰럽다. 아니 노인
이 되기가 두렵기까지 하다.


지팡이·돋보기·휠체어·보청기까지는 아니라도...
선진국, 틀니 비용 어떻게 처리하나


현재 우리나라 노인의 70% 이상이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인 1인당 월평균 수
입이 2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며, 자녀로부터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에 틀니사업에 소요될 재원의 확보는 ▲의료보험료 ▲노인복지기금 ▲독자적인 틀니재원 마련 등이 제
안되고 있는데, 특히 기존의 의보체계와 별도의 노인보건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의 실정이 우리에
게 적합하다는 주장이 많다.

일본 65세 이상 거동불편 노인과 70세 이상의 모든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노인보건제도가 일반인 의료
보장체계와 다르게 운용되고 있다. 노인보건제도의 재정은 일부 본인부담과 공비로 구성된다. 틀니의
경우 보험자 70%, 정부 20%, 지방자치단체 10%의 부담으로 조성된다.

독일 근로자·사용자·자영업자·연금수급자의 보험료, 정부보조금 등으로 구성되는 독일의 의료재원에서
틀니는 보험회사, 연금보험자, 본인 부담금으로 재원이 소요된다.

영국 의료재원은 모두 조세를 통해 조달하는 방식(National Health Service). 다만 약국을 이용할
때와 일반 치과서비스 및 의치 서비스를 받을 때 등에는 약간의 본인 부담금이 존재한다. 노인의 틀니
사업에 소요되는 예산은 조세와 일보의 본인 부담금으로 운영된다.

프랑스 인구의 99%가 공적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는 프랑스의 의료보험 재원은 국가에서 재원의 1% 미만
을 부담하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재원은 의료보험료를 통해 조달된다. 틀니의 경우 의료보험재원
과 25% 본인부담금으로 이뤄진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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