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일과 꿈]나의 영웅, 나의 아버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7-03 오전 10:23:00
나의 소녀시절은 항상 외로웠다.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그 감정은 집
착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그가 즐거워하고 나를 사랑해줄지 늘 고민하던 조숙한 아이
였다. 그 대상은 바로 나의 아버지, 고 추송웅(秋松雄 1941~1985)이었다. 색색의 조명 아래서 끊임없
이 자신의 가면을 바꾸어가며 객석을 웃기고 울리던 아버지

그런데 그 찬란하던 빛은 아버지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가 스르르 꺼져버렸다. 무대 위에서 모든 열정
을 쏟아냈기 때문일까. ‘가정’은 아버지에게 몸에 잘 맞지 않은 옷처럼, 부대끼는 공간이었나 보다.
그런 아버지에게 사랑받기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기억들을 돌이켜보면 아직도 가슴이 아려오곤 한
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을 그토록 서운하게 했다.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오로지 연기밖에 모르고 살
았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아직까지도 지겹도록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나는 ‘미소’와 ‘파괴’라는 제목의 두 편의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면서 ‘아버지의 피’가 내 혈
과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감정을 즉석에서 표출하는 것이 아닌, 내면의 심리를 절제하면서 표
현하는 연기에 눈떴기 때문이다. 비록 수십억 원을 들인 블록버스터는 아니지만 저예산 영화를 통해 연
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음을 실감했다. 10년 가까이 연기활동을 하며 ‘연예
계’란 곳에 속해 있지만, 이 또한 나에게 ‘맞춤복’은 아닌 듯하다. 돈이나 인기, 명예와 관련된 일
보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순수하게 ‘연기’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것이 즐겁
다. 마치 우물 저 깊은 밑바닥에서 가장 맑음 물의 정수를 맛보는 것과 같다.

요즘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8월 20일 제일화재 세실극장에서 막이 오르는 ‘프루프(Proof)'라
는 작품인데 정말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무대다. 이 작품에서 나는 유명 수학자 로버트의 딸 캐서린으
로 등장해 천재적인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정신질환을 앓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고뇌하는 역할을
선보이게 된다.

어린시절의 연극 무대는 향기로운 분장냄새, 무대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포트라이트 불빛 아
래서 흩날리던 먼지가루를 연상시킨다. 이 모든 오감의 기억들이 내 영혼의 탱크에 고스란히 저장돼 있
다. 그 어는 때보다 연기 욕심이 많은 지금, 오랜만의 무대연기는 정말 가슴 떨리는 도전이 아닐 수 없
다. 방송과 영화를 병행하는 게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지만 새로운 나와의 만남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직 표현되지 못한 내 열정의 끝자락까지 다 내보이고 싶다. 내 영
원한 질투의 대상인 아버지처럼, 나도 스스로 ‘운명적인 배우’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그날까지 달
려갈 생각이다.

내가 진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아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다양한 인간의 삶을 이해
하면서 내 연기의 폭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조바심 내지도 않으며 내 삶과 연기가
어우러지는 것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관객들의 마음속에도 추상미라는 배우가, 동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진실한 인간의 모습으로 남았으면 한다. 더불어 두 명의 오빠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서울 홍익대 부근의 ‘시네마테크-떼아트르 추’에서 예술영화는 물론 연극, 전시 행사를 계속해
아버지의 깊은 뜻을 잇고 싶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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