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남편의 티셔츠를 입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5-22 오전 11:39:00
아침 잠결에 침대 밑 발치에 걸리는 대로 옷가지를 집어 걸친다는 것이 꿰고 보니 남편의 티셔츠였다.
아침 준비에 식구들 도시락 챙기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라 남편 것이면 대수랴, 이왕 걸친 김에 그냥 입
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남편 출근시키고 애들 등교시키고 나서 설겆이에, 청소에, 빨래까지 내쳐 하다보니 아침에 잘못 입은 남
편의 티셔츠를 갈아입을 새도 없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려 했다. 품이 넉넉해 일하기에 편하기도 해
서 그대로 입은 채 저녁준비까지 하고는 막 벗어서 빨아두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남편이 퇴근을 했다.

"아니, 당신 아직도 내 옷 입고 있네."
"응… 당신 옷 입고 있으니까 온 종일 당신하고 함께 있는 것 같아서 좋네…."
"그러고 보니 내가 당신을 하루 종일 감싸안고 있었던 것 같아서 나도 보기 좋으네…."

둘다 마음에도 없는 희떠운 소리를 즉석에서 해 놓고는 '말 된다'며 오랜만에 한참 웃었다. 사춘기 애들
을 둔 중년부부가 젊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닭살스런 소리'를 능청스레 주고 받고나니 아닌 게 아니라
없던 정도 새삼스레 솟는 것 같았다.

올해로 결혼 15년째, 우리 부부도 남들처럼 나 자신만큼이나 상대방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곰삭아지고 있다. 이민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우리 또한 지난 11년간의 이민생활
이 부부간의 웃고 싸우고 화해하고 이해하는 시간의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해왔음을 절감한다. 호주 땅
이방인으로서 결코 녹록치 않았던 시간을 함께 헤쳐나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 둘도 없는 , 아니
둘 밖에 없는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더군다나 교민이라곤 없는 소도시에서 살다보니 미우나 고우나 식구들끼리 밤낮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동안, 말그대로 이민생활의 서러움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감정이 스물거리고 올라올 때가 한 두번이 아니
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가장 든든한 친구요, 영원한 같은 편이며, 책임감있게 울타리를 지키는 어머니
요, 아버지가 되고자 서로를 다독이곤 한다.

지난 달 어느 주말 저녁, 네 식구가 옹기종기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는데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남편이 평소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소년처럼 들뜬 목소리로 거침없이 명랑
해지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다니던 교회 봉사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던 50세에 가까운 연배 회원 중 하나가 놀랍게도 그
날 결혼식을 올리고 호주로 신혼 여행을 오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는 중이라며 공항서 건 전화
였다. 이민 이후 10년도 넘게 끊어졌던 사이인데도 남편은 마치 줄창 그 사람의 소식을 기다려왔던 사람
마냥 반가와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자신의 신혼여행지인 시드니와 우리가 사는 도시가 서울 부산 쯤 되는 거리인 줄 알고 호주만 오면 당연
히 만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던지, 나중에사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걸 알고는 그 쪽은 대단히 실망스
런 눈치였다. 사나흘 간의 신혼여행 중에 몇 차례 안부전화가 더 온 것만도 대단한 정성이건만 떠나기
마지막 날, 미처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고 아쉬워 하는 남편이 은근히 질투가 날 정도였다.

어느 주말 저녁 느닷없이 20대 초반으로 훌쩍 넘어가 청년 시절의 추억을 더듬던 남편은 한 껏 부풀었
던 풍선처럼 그 날 이후 아스라이 바람이 빠지면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이같은 ‘외도(?)’이전에 실은 나의 배신(?)이 조금 먼저였다.

얼마 전 한국의 어느 매체에 실린 내 글로 인해 졸업 후 연락이 두절됐던 대학 동창들과 무더기로 연결
이 된 것이다. 나 또한 남편 못지 않게 달떠서 실로 15년 만에 마치 여대생으로 돌아간 듯 이미 40대 아
줌마가 된 친구들과 ‘얘, 쟤’ 하면서 이메일을 주고 받느라 남편을 한 동안 소외(?)시켰던 것이다.

버려진 여자보다 ‘잊혀진 여자’가 더 불쌍하다고 했던가. 어떤 선택, 어떤 이유로 이민을 작정했던 간
에 이민길에 오른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잊혀진 사람들이 되어버린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어쩌면 마음
이 모질어서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과 내 쪽에서 먼저 작별을 고하고 이렇듯 쓸쓸한 삶의 여정을 택
한 것이리라. 뜻하지 않은 해후를 이처럼 갈망하면서도 미련없이 제 자리로 다시 돌아올 것도 이미 관성
으로 체득한 듯….

남편도 나도 다시 찾은 한국의 친구들로 인해 한바탕 활기를 얻은 후 10년 지기들을 일상의 목록에 추가
시키곤 다시 둘만의 생활로 돌아왔다. 각다분한 이민 길의 변치않는 동반자로 오래오래 함께하고픈 소박
하고 밋밋한 소망 속으로….이따금 치기가 발동한다면 짐짓 남편의 티셔츠를 꿰고는 평소에는 못하는 희
떠운 소리로 장난끼어린 무늬를 그리며 그렇게 오롯이 살아갈 것이다.

/신아연 기자 (ayoun_jinx@hotmail.com)

오마이뉴스 200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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