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위에 되살린 동심과 자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4-28 오후 2:18:00
그의 작업실은 강원도 춘성군 내평리의 폐교. 교실 벽에 붙어있 던 낡은 칠판을 캔버스삼아 특유의 칠판
화를 그린다. 그림속 인 물들은 해맑은 얼굴의 어린이와 시골사람 또는 중앙아시아의 고 려인이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5월1일부터 13일까지 작품전을 여는 김명희(54)씨는 ‘유전(流轉)의 역동
성’이란 제목으로 칠판위 에 끊임없이 움직이며 동화하는, 부류(浮流)하는 삶을 담아낸다. 희뿌연 분필
자국이 남아있는 붙박이칠판위로 한때 교실의 주역 이었던 어린이, 운동장 한귀퉁이의 식물이 들어서면
서 잊어진 공 간과 생물이 되살아난다.

◈인생유전〓어려서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영국서 살았다 . 이화여고, 서울대 회화과를 거쳐 미
국으로 건너간 것이 75년. 이화여고 미술교사시절 동료로 만난 화가 김차섭(63)씨와 76년 미국서 결혼,
뉴욕의 예술인동네 소호에서 살았다. 생활을 위해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의상 부티크도 운영했
다. 소수민족 의 자아정체성 문제로 갈등하다가 미국생활 15년만에 90년 영구귀 국하면서 강원도 내평
리 폐교에 자리잡았다.

◈폐교생활〓80년대 후반 뉴욕의 한인신문에서 강원도 분교를 싸 게 판다는 광고를 보고 마음이 동했
다. 46번 국도에서 춘천과 양 구의 중간쯤에 위치한 오지마을, 소양강댐이 들어서고 인근마을 이 수몰되
면서 학생이 끊긴 초등학교다. 교실 4개의 분교를 5000 여만원에 구입, 개조후 작업실을 겸한 살림집으
로 쓰고 있다. 겨 울이면 기온이 섭씨 영하20도로 뚝 떨어지고 TV도 없는 산간마을 에서 꿩과 원앙이 날
아드는 운동장에 야채를 키우며 김치도 직접 담가먹는다. 가끔 서울과 뉴욕나들이를 통해 새로움을 접하
는 한편, 동네이웃들과도 서로 왕래하며 지낸다.

◈칠판그림〓진초록색 칠판위에 오일파스텔로 사진처럼 꼼꼼하게 표현한 그림은 칠판자체의 짙은 색과
어울리면서 입체감까지 느 껴지는 묘한 색감을 이뤄낸다. 새 칠판엔 초등학교 수업시간처럼 분필로 오선
지와 음표, 삼각형과 아라비아숫자를 낙서한 뒤, 동 그스름한 얼굴에 유순한 눈매의 아이들, 갓 따온듯
싱싱한 야채 , 한복차림의 고려인을 그려넣는다. 근래 칠판화속으로 비디오와 지도를 끌어들였다. ‘김
치 담그는 날’은 김치담그는 자화상과 더불어 버드나무가 바람에 휘날리는 영상을 설치한 작품. 비디
오기기외에 지도를 활용한 ‘메타여행’에선 칠판위에 그린 세계 지도 위로 장난감기차가 지나간다.

◈부부화가〓미술인부부에게 여행은 여가라기보다 작업의 연장이 다. 미국서도 인디언거주지역 등지를
찾아다녔고 틈틈이 멕시코 이집트 그리스 중앙아시아 등지로의 여행을 통해 문명의 발상지 와 한민족의
흔적을 쫓는다.

미국생활에서 경험한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97년 시베리아횡 단열차를 타고 둘러본 중앙아시아에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상실과 향수, ‘강요된 유전’의 삶과도 이어진다. 남편 김차섭
씨는 작년 10월 서울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에 서 화업 40여년을 조망한 초대전에 이어, 제14회 이
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을 올 가을에 갖는다. 부부는 서로의 미술세계에 활력 을 더해주는 이상적인 경쟁
자다.

신세미기자 ssemi@munhwa.co.kr

문화일보 2003.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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