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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는 흔히 인생의 절반은 '잘 차려진 식탁의 즐거움'을 찾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다. 얼핏 생각하면 고작 그것뿐이겠느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여유롭고 행복한 삶이 더 중요하다고 짐짓 강조해보지만, 이도 결국에는 잘 먹은 자의 여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팔도음식이 깊은 맛과 은근한 정을 베푼다면 이탈리아의 음식은 화려하고 다양한 색, 그리고 혀끝의 무력함을 거두어 버리는 세찬 바람과 같은 맛을 연출한다고 한다. 금방이라도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킬 것 같은 파고로 오감을 휘어잡는 강인한 맛의 거인인 것이다. 이탈리아 각 지방의 음식들은 햄버거에 콜라를 먹고 디저트로 감자튀김을 먹는 현대사회의 여유 없는 생활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전통적인 이탈리안 스타일(Italian style)의 환타지(fantasia)를 고집한다.
이탈리아는 우리처럼 반도국가이다. 지중해를 건너는 한 거인농부의 장화 앞에 펼쳐진 알프스, 그 산의 만년설에 피어나는 에델바이스. 그 꽃을 바라보는 수줍은 소녀의 불그스레한 뺨을 연상시키는 적포도주, 거인의 장화에 금방이라도 걷어 차일 것 같은 시칠리아. 그 곳 여인들의 한 맺힌 삶을 토해내는 붉은 오렌지와 지중해의 소금기에 젖은 빵, 그리고 게으른 손길로 그물을 던지는 가난한 어부. 식탁의 빈곤함마저도 자연의 축복으로 삼아 낙천적인 허심을 위로하는 빈처. 이들은 그대로 이탈리아인들의 음식 속에 녹아들어 어우러진다.
우리의 음식이 된장, 고추장, 간장, 그리고 고춧가루 등의 예술이라면, 이탈리아 음식은 올리브, 레몬(또는 포도주식초), 소금 그리고 근대이후에 대중화된 토마토 소스를 기본 양념으로 각 지방의 고유한 식품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국과 찌개가 있다면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사형수의 목구멍까지도 따듯하게 위로해 준다는 고기수프와 한잔의 포도주가 있다. 이탈리아의 포도주는 각 지역에 따라 도수와 맛 그리고 향을 달리한다. 그 지방의 전통음식이 차려진 식탁에는 항상 그 지방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오르는 이유이다. 피에몬테의 바르베라(Barbera) 포도주는 우리의 버섯에 해당하는 타르투퍼(tartufo)의 맛과 향기로 그날 저녁 여인의 사랑을 영원으로 인도한다고 알려져 있다. 흐르는 세월에 장사 없고, 먹고 죽은놈 때깔도 곱다는 우리의 표현처럼 '잘 차려진 식탁의 즐거움'과 '목구멍의 즐거움'은 분명 운명을 이기는, 아니 운명이 엮어 가는 수많은 고뇌의 무게를 버텨내게 하는 유일한 낙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는 이탈리아 중북부에 위치한 토스카나 지방의 음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토스카나는 천년왕국설의 수도승 사보나롤라가 화형되었고,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폰테 베키오 다리의 밑을 흐르는 아르노강의 도시이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와 오늘날에도 중세의 도시이기를 고집하는 시에나가 있는 이 지방은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의 맛과 색으로 유명하다.
예부터 문인들은 토스카나 지방의 음식이 차려진 식탁 앞에선 과히 환산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과장해왔다. 아마도 이 지방의 요리가 부드러운 선과 고전적인 품격이 조화된 이곳의 자연을 모방한 최대의 걸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에밀리아 지방의 식문화가 열정과 선정적인 쾌락을 추구한다면, 토스카나의 식탁은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자연의 실루엣을 연상시킨다. 특히, 단순한 접시들의 자태, 결코 완벽미를 추구하지 않는 게으름의 지혜, 요리사들의 환타지, 이 모든 것이 천상의 재료들을 만난 곳, 이 곳이 바로 토스카나이다.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육류 요리들 중에 으뜸은 단연 비스테가 알라 피오렌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 즉 피렌체식 스테이크이다. 일주일을 굶지 않고는 결코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푸짐한 이 스테이크는 풍요와 행복이 넘치던 과거의 피렌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이 요리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올리브기름을 곁들여 겉만 살짝 익힌 다음 소금을 살살 뿌린 후에, 소금과 레몬 그리고 올리브기름으로 양념한 야채샐러드와 함께 먹어야 한다. 나이프로 살짝 표면을 그어대면 그 파인 골을 따라 신선한 피가 흐르는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여기에 키안티(Chianti) 적포도주 한잔이면…. 여러분은 방금 위대한 토스카나의 역사를 드셨습니다.
토스카나는 결코 바로코를 모방하지 않는다. 외국의 현란하면서도 가벼운 느낌보다는 소박, 단순하면서도 깊은 정과 맛을 선호하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집이다. 중세부터 이곳 사람들은 고기 요리 중에 으뜸인 것은 역시 하늘을 나는 새의 고기 요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날개에 붙어있는 얼마되지 않는 살의 맛에 대한 그들의 신념은 '어두육미'에 대한 우리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콩(fagioli), 양엉겅퀴……어디 이것 뿐인가, 토스카나의 어느 도시를 가든지 지라로스트, 일명 회전통닭구이인 '고기요리전문판매점'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우리 나라의 전기구이 통닭처럼 굵은 쇠에 매달려 장작불 위를 곡예하는 닭, 꿩, 돼지, 멧돼지 고기를 즉석에서 원하는 만큼 판매합니다. 조금 비싸지만, 이곳의 빵과 함께 먹는 그 맛은 일품이다.
티레노해(海)의 해산물 요리도 인상적이다. 넉넉한 올리브기름에 잠길 듯 오목조목한 크기의 온갖 바다과실들이 흰색의 테라코타 그릇에 담긴 채 식품진열장에서 지나가는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시에나(Siena) 유학시절, 시내 중심가의 정부기록보존소에 출입하면서 집에 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가곤 하던 나는 늘상 지나가던 길이지만, 항상 새로운 음식들 앞에 마치 복풍을 그리워하는 오랑캐 말처럼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러나 결국은 주머니의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옆의 조각 피자 판매점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치 자장면을 먹으러 중국집에 들어갔다가 옆 사람이 먹고 있는 짬뽕 국물의 유혹에 넘어가 짬뽕을 시키고 결국에는 후회하던 그 경험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귀국을 하루 앞둔 그날 푸른 눈의 여자친구와 함께 하던 촛불의 만찬에서 토스카나의 해산물 요리를 발견하였을 때 난 그녀에게 "아! 죽어도 좋아!"라고 했다. 그날 난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이탈리아는 툭하면 파업, 자고 나면 정권교체, 화장실 갔다오면 마피아 살인사건……. 마치 끝없는 혼돈의 연속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러한 이탈리아, 특히 토스카나 지방을 끝없이 동경한다. 그 이유는 매일 아침 이곳에는 바람의 힘으로도 벗길 수 없던 옷을 열정적인 애무로 스스로 벗어 던지게 만든 지중해의 태양이 뜨고, 자신들의 갈비뼈보다 더 아름다운 여성들이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신의 축복을 최고의 경지로 승화시킨 식탁의 예술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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