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균등한 사회다. 큰부자도 없고 특히 가난한 사람도 없다. 1973년 일본 총리실 조사를 보면 자신의 생활정도를 '중류'라고 답한 사람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1억 총(總)중류시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 동안 일본 정보의 시정(施政) 목표는 약자가 도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달라지고 있다. 기업의 연쇄도산,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 등으로 '함께 잘 사는' 일본 모델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경쟁을 외면하는 시스템 때문에 사회적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반성에서 강자를 더욱 강하게 키우는 영·미 모델이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 일본에선 과거에 볼 수 없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종신고용제 붕괴, 연봉제로의 급속한 전환으로 경제 격차가 커지고 있다. 기업이 25% 이상이 이미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정보기술(IT) 혁명도 양극화를 재촉하는 한 요인이다. 젊은 직장인들은 10년후 내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며 불안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결혼을 늦추거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만혼(晩婚)과 비혼(非婚)이 늘어나고 있다. 대조적으로 호화판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1억엔(약 1억원)이 넘는 초호화 아파트가 불티나게 분양되는가 하면 1인당 2만2천엔이나 하는 프랑스식 레스토랑은 예약이 밀리고 있다. 2010년에는 중류층이 사라지고 90%의 빈민층과 10%의 부유층만 남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을 정도다. 중류층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일본이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평등은 기회의 평등과 결과 평등 둘로 나뉜다. 북유럽 국가들은 기회 평등과 결과 평등, 미국은 기회평등과 결과 불평등, 영국·프랑스는 기회 불평등과 결과 불평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북유럽형에 가까웠으나 80년대 후반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나타나면서 달라지고 있다. 80년대 후반은 일본이 고도성장에서 안정성장 내지 저성장으로 전환한 시기다. 일본 사회가 앞으로 미국 모델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미국 모델의 장점인 기회 평등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기회불평등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 동안 정계에서나 볼 수 있던 '세습'이 사회 각 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화이트칼라 고위직에서 부자간 상관관계가 두드러지고 있다. 사회학자들이 10년 주기로 조사하는 '1995년 사회 계층과 사회 이동 전국조사'에 따르면 부친이 화이트칼라 고위직인 사람이 40세 시점에서 화이트칼라 고위직에 오를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8배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사회학자들은 기회 불평등은 궁극적으로 계급으로 고착돼 사회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릴 것이며 사회의 건강성을 크게 해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전후 50여년 동안 평등사회 일본을 지켜온 중산층 신화는 붕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