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서 숨진 부친… 지갑엔 단돈 2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1-06-14 오후 6:04:00
'아버지는 전쟁 속에서도 살아 남았지만 결국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96년 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한국으로 되돌아간 오정우씨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뒤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숨진 아버지의 삶을 소개했다. 96년 1월 뉴욕에는 10여년 만에 최대 폭설이 내렸고 아버지는 집에도 두 블록쯤 떨어진 길가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주머니에는 2달러가 들어 있었다. 내 생애 마지막으로 관 속에 모신 아버지의 손을 만져보았다. 손가락 끝에 베인 자국들이 선명했으며 뜨거운 스팀에 덴 화상자국도 있었다. 드라이클리닝 때 독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느라 손톱색깔을 바래 있었고 손바닥 곳곳에 군살이 박혀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이 예전엔 너무도 부드러웠는데'라고 말했다. 아버지 시신은 많은 얘기를 담고 있다. 그의 손은 한국계 이민자들이 공통적으로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준다. 아버지는 86년 어렵사리 미국이민을 결심했다. 세 자식이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의 최고 명문대를 졸업한 아버지는 한국에서 간부직과 좋은 아파트, 세계여행, 골프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미국이 생활하기에 더 어려울지 모르나 아버지는 시련을 이미 경험했다. 아버지는 10살 때 한국전이 터져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가고 폭탄을 피해 방공호로 대피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죽은 어머니 앞에서 우는 고아들과 기아에 허덕여 식량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버지는 트럭을 탄 미군들이 어린이들에게 초콜릿과 껌을 던지는 장면도 보았다. 미군은 '해방자'였으며 미국은 자유와 기회, 정의의 나라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아메리칸 드림은 시작됐다. 86년 3월 우리 가족은 뉴저지주에 도착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갖고 온 돈으로 교외의 꽤 '괜찮은' 집 한 채를 샀으며 생활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회사도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살림살이는 급격히 쪼들렸다. 수십장의 이력서를 보냈지만 면접통지가 온 곳은 몇 곳에 불과했다. 결국 아버지는 뉴욕 빈민가인 할렘 근처에서 카드판매점을 시작으로 맨해튼 의류공장을 거쳐 96년 생을 마감한 비좁은 집(아파트)이 있는 퀸즈에서 세탁소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6일 일했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제외하고는 휴일이 없었다. 7시부터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세탁소의 열기는 여름에 참기 어려웠으며 유독물질로 인해 인명피해도 있었다. 아버지는 늦은 밤 녹초가 돼 귀가했다. 그럼에도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열심히 일한 대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산더미 같은 빚과 강압적인 채권자, 권총강도, 수치심, 차별, 따돌림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 오후,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맨해튼의 사람과 차량으로 붐비는 거리를 거닐었다. 아버지는 일요일 오후 산책, 도시분위기, 고층건물, 노상카페 등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얘야, 세계에서 이런 곳은 없단다. 네가 맨해튼을 본다면 세계의 모든 도시들을 보는 거야'라고 말했다. 내가 17살 때였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다. 아버지는 96년 1월 폭설이 내린 뉴욕 동부 퀸즈의 한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가 아버지와는 마지막이었지만 그의 손에 담간 자취를 내 기억 속에 새기지 않고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낼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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