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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일부일처제 결혼 방식은 가족적 결합을 보다 공고하게 만들고 노후를 보장하는 재산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부부 쌍방간에 성적으로 불만스럽다는 단점이 있다고 사회학자들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끊임없이 외도를 하고 여성들은 자유로워진 행동을 통해 이탈리아나 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이국적 남성들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결혼 습속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 브리튼 사람들에게서 보던 프루나이혼이라는 집단결혼의 형태는 원래 원시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결혼의 형태였다. 특히 태평양 연안의 폴리네시언 사회, 즉 하와이제도나 오스트레일리아 미개민족의 부족사회에서는 그 유형이 아직 남아있다.
이런 결혼방식이 채택된 것은 부족의 보다 확고한 자위수단 중 하나였다. 즉 혈족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강력한 전투력이 되어 침공한 적에 일치단결해 대항, 배신을 미연에 방지해 두터운 신뢰와 묵시적인 양해가 견고하게 성립되는 장점이 있다.
하와이제도 타히티섬 원주민 가운데 어느 부족은 형제들이 다른 가정의 자매들과 집단으로 결혼하는 형제자매혼이라는 혼인방식을 지금도 택하고 있다. 그러니까 언제나 파트너가 교환되고 그런 가운데 아기를 낳는다. 태어난 아기가 형제자매 누군가를 닮게 되면 닮은 사람이 부모가 된다는 근친상간적 가족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5∼6명 내외의 형제자매간 집단결혼으로 한 명의 남편이 처를 여러 명 소유하고 똑같이 한 아내가 5∼6명의 남편을 갖는 다부다처 방식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여왕도의 두루아푼나 부족에서는 이 집단결혼의 형태를 운가라혼이라고 부르는데 두 쌍의 부부가 서로 부부를 교환하는 희한한 결혼 습속이 있다. 여자들은 노아 또는 누바라고 하며 노아는 남편의 허락이 있으면 남편의 혈족들과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성적 교접을 가질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노아와 성적으로 결합한 혈족들은 피라 우르라고 칭해 좀더 친밀하고 거대한 혈연단체를 형성하게 된다.
폴리네시언의 피가 흐르는 일본에서도 전쟁 전까지는 농촌이나 어촌의 외진 부락에선 약중숙(若衆宿·와카노모노야토)이라는 것이 있어 어른들의 감독하에 혼전교접이 실행되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이나 남미 그리고 인도와 뉴칼레도니아제도의 미개 사회에서는 '젊은이의 집'이라 칭하는 미혼 남자의 집회장소가 인가로부터 떨어진 숲 속에 마련돼 있었다. 그곳은 남자들이 공동취사하며 농경이나 사냥에 나서는 거점이었다. 그러나 밤에는 이 장소에 미혼의 젊은여성들을 불러 자유로운 섹스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총각들은 집을 떠나 여기서 생활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도의 드라비다 원주민에 속하는 나그푸르족 사이에선 '마을의 가장 훌륭한 가옥은 청년의 집이다. 그 지역의 청년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건립한 것으로 그들의 집단 침소로 이용된다. 또한 미혼의 아가씨들도 마찬가지로 부모집에서는 자지 않는다. 그녀들은 마을의 과부집에 머물면서 청년의 집을 찾아가 프리섹스를 즐긴다'한다.
또 뉴칼레도니아제도에서는 청년들이 바이에라고 부르는 특별한 집에 기숙하면서 동료를 만들고 공동생활을 즐기며 다른 마을 아가씨들과 혼전교접을 즐긴다고 한다. 이 아가씨들은 여기서 3개월 동안 체재하며 남자에게 성적으로 봉사한다. 그녀들은 그 바이에서 창녀처럼 섹스 때마다 수당을 받는다. 그 돈을 모아 결혼 지참금으로 쓴다. 마을 남자들은 유녀가 된 그녀를 존중하고 기꺼이 신부로 맞이한다.
이들 바이에는 항상 20, 30명의 젊은이들이 기숙하며 한 마을에 두 세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바이에들을 차례차례 옮겨가는 부지런한 아가씨들도 많았다. 이 청년들의 집은 후에 발전하고 변형되어 유희장, 집회소, 무도장, 공회당, 재판소, 추장의 저택, 여관, 예배소, 사원 등이 되었다. 성은 이미 꺼림칙한 종교적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간통이나 외도라는 말조차 사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또한 창녀의 존재 이유도 없어졌다. 매독으로부터도 낙태의 공포로부터도 여자들은 구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프러시아는 활기에 넘치고 부유한 국가로 근대 유럽에 군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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