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가 지금까지의 통설처럼 임금과 세자 사이의 권력갈등 때문에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홀륭한 임금을 만들기 위한 훈육책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영조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참혹한 심경을 토로한 묘지문이 2백50년만에 공개되면서 드러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영조의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을 공개했다.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 사각형 청화백자 다섯장에 쓰여있는 이 묘지문의 작성일자는 영조 38년(1762년) 7월로 기록돼 있다.
임금이 쓴 묘지문은 통상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은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마음을 밝힌 것이니…"라면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 5월하고도 221일이라"로 시작하는 이 묘지문에는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뜻대로 안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래서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아들을 뒤주에 가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어 아들의 죽음이 뜻밖의 일이라며 "여러 날(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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