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는 소멸되는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09-19 오후 12:43:00
국문학과 위상 하락 폐과(廢科) 줄이어 졸업생 직업 선택 폭 좁은 게 가장 큰 이유 문화콘텐츠·디지털
스토리텔링 등 새 분야 개척 전문성 없는 ‘아류 국문학’의 등장은 경계해야 “없애면 안 된다” “디
지털시대여도 기본은 인문학 당장 필요없다고 본질을 없애면 위험 가뜩이나 빈곤한 창의력 더 악화될
것” “변해야 한다” “순결주의만 고집하단 고유 영역마저 축소 수박 겉 핥기식 공부론 경쟁력 없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한양대 안산캠퍼스에는 ‘문화콘텐츠학과’라는 학과가 있다. 2004년 국제문화대학 인문학부 안에 개설
된 이 학과는 아직 첫 졸업생도 배출하기 전이지만 벌써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문화콘텐츠
(30명)와 국어국문학, 문화인류학 등 3개의 전공이 포함된 인문학부 정원은 120명. ‘모집정원의 최대
120%까지 학생을 뽑을 수 있다’는 교칙에 따라 문화콘텐츠학과는 설립 첫해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36명
씩을 뽑아왔다. 희망자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외관상 공통과정을 이수한 후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
하게 돼 있지만 해마다 이 학과는 학부 전체 1등에서 36등까지를 싹쓸이했다. 한양대는 내년 문화콘텐츠
학과를 학부에서 독립시킬 계획이다. 모집 정원도 40명으로 늘어난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문화콘텐
츠 전공이 인문학부에서 빠지면 좋은 학생을 더 이상 끌어올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
가 나오고 있다.

문화콘텐츠는 영화·게임·애니메이션·음반·캐릭터·방송·전자책(e-book)과 같은 영상미디어와 뉴미
디어를 기반으로 저장, 유통, 향유되는 문화예술의 내용물을 일컫는 말이다. 여러 분야가 한데 얽힌 대
표적인 ‘컨버전스(convergence)’ 학문이다. 그런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설립을 주도한 박상천(52)
교수와 박기수(42) 교수는 국문학자다. 박상천 교수는 시인 출신이고 박기수 교수 역시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김기림 시인론’을 택했던 문학비평 전공자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문화콘텐츠학과는 국문학
과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총 4명으로 구성된 교수진 중 두 박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각각 신문방송
학과와 경영학과 출신이다. 개설 과목 대부분이 ‘만화대본 워크샵’ ‘게임 기획과 시나리오’ ‘문화
이벤트 컨설팅’ 등 철저하게 실습 위주로 꾸려진다는 점도 독특하다. 재학생 전원은 3학년 1학기부터 3
학기 동안 관련 업체에 파견, 인턴으로 근무할 기회도 얻는다. 업체 알선과 파견 비용 부담은 모두 학
교 몫이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6번 코너에는 컴퓨터·전기·전자 관련 서적이 모여 있다. 한혜원(31) 계원조형예
술대 교양학부 교수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책 ‘디지털 스토리텔링’(황금가지)을 찾으려면 이곳으로 가
야 한다. 디지털 스토리텔링(digital storytelling)이란 디지털 기술을 매체 환경이나 표현 수단으로 수
용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디지털 콘텐츠를 지칭하는 용어다. ‘윈도우 웹 서버 보안’ ‘현대암호
학’ 등과 나란히 꽂혀 있는 이 책 역시 한 교수와 이인화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를 비롯한 국
문학자들이 엮은 것이다.

한혜원 교수는 이화여대 국문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 역시 현대문학을 전공하다 몇 년 전
부터 게임 스토리텔링을 깊이 있게 연구해오고 있다. 그는 카이스트(KAIST) 대우교수를 거쳐 올 초 계원
조형예술대 전임 강사로 정식 임용됐다. 아직 박사논문이 진행 중이고 젊은 나이임을 감안할 때 파격적
인 조건이다.

학과 명칭 바꾸는 학교도 늘어
흔히 ‘국문과’로 통칭되는 대학 국어국문학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나 한
혜원 교수의 경우와 같이 국문학 본류에서 이탈한 후 전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사례가 그 첫 번째
현상. 가톨릭대에서는 국어국문학과 재학생이 디지털문화학부 수업을 연계전공 형태로 수강할 수 있다.
서울대 국문학 박사 출신인 송성욱 교수가 시스템을 만들었다. 인하대(인천)의 경우 한 캠퍼스에 국어국
문학과와 문화콘텐츠학과가 공존하고 있다. 서원대(충북 청주) 김외곤 교수는 국문학자이지만 국어국문
학과 소속이 아니라 광고홍보영상학부 내 문화콘텐츠 전공 지도교수다. 강원대에서도 작년부터 국어국문
학과와 별개로 문화예술대학 소속 스토리텔링학과가 개설, 운영되고 있다.

학부는 그대로 두되, 대학원 과정에서 비슷한 실험을 감행하는 대학도 늘고 있다. 디지털미디어학부를
만들어 국문학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가 대표적인 예. 성격은 약간 다르지만 미
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을 본떠 만든 카이스트(KAIST)의 CT(Cultural Technology)대학원도 비
슷한 경우다. 매년 10억원씩 총 100억원의 국고 지원이 확정된 CT대학원의 경우, 최근 ‘불멸의 이순
신’의 소설가 김탁환 교수와 ‘경성기담’의 저자 전봉관 교수 등 서울대 국문학 박사 출신 교수진을
대거 영입해 화제를 불러모았다.

기존 학과의 성격을 유지하되 타이틀, 즉 학과 명칭을 바꾸는 학교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호서대
학교(충남 아산). 이 학교에서 국어국문학 전공은 한국어문화학부에 포함돼 있다. 독특한 것은 한국어문
화학부로 입학한 학생 전원은 국어국문학 이외에 또 하나의 전공인 문화콘텐츠창작을 복수전공해야 한다
는 점이다. 학교 측은 “졸업과 동시에 두 개의 졸업장을 획득할 수 있으며 국어국문학적 소양을 바탕으
로 문화콘텐츠 분야의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학생 모집에 나서고 있다. 장안대(경기 화성)
의 경우 아예 국어국문학과 자체가 없다. 대신 ‘디지털문예창작과’가 있다. 소속 교수 3명은 모두 국
문학 박사 출신. 이 학교 역시 학습목표에 스토리텔링이나 멀티미디어 저작 도구, 디지털 콘텐츠 등의
용어가 빠지지 않는다.

국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사진은 작년 9월 전국 80개 인문대학이 모인 가운
데 이화여대에서 열린 인문주간 개막식. ‘인문학 교육 정상화를 위한 성명서가 발표됐다. (photo 조선
일보 DB)

최근 신설되는 대학이나 전문대학의 경우 아예 출발 단계에서부터 국문학과를 만들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1994년 설립된 동양대(경북 영주)에는 국어국문학과가 없다. ‘교양학부’라는 게 있어 국문학을
전공한 교수진이 약간 명 배치될 뿐이다. 1993년 설립된 남서울대(충남 천안) 역시 인문계열에 국어국문
학과가 포함돼 있지 않다. 대신 교양과정부에 ‘국어 한문 전공’ 교수가 3명 있다. 성결대(경기 안양)
의 경우 국문학과와 사학과를 합쳐서 ‘한국학부’라는 이름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학과의 존재와는 별도로 대학 1년생의 대표적 필수 교양과목이었던 ‘국어와 작문’ 역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국어와 작문’을 ‘필수’가 아닌 ‘옵션’으로 돌린 최초의 대학은 가톨릭대. 교수
가 되기 전 국문학 강사들의 최고 일자리였던 ‘국어와 작문’이 사라지면서 해당 강사들은 졸지에 갈
곳이 없어졌다. 몇 년째 2~3개 대학에서 ‘국어와 작문’을 강의하던 한 강사는 지난 학기 “국어와 작
문 대신 디지털 스토리텔링 강의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요구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국어국문
학과의 전통이 오랜 서울 소재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 전체 신입생에게 비교적 엄격하게 ‘국어와 작
문’ 수강을 요구하는 학교는 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 국문과 강사들
의 얘기다.

“국어 그거 애들 작문이나 하는 과목 아닙니까?”
최근 국어국문학과를 둘러싼 일련의 변화는 사실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학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지방대 교수들을 만나면 ‘이제 천안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학생 모집이 안 되는 지
역권 범위가 그렇다는 거지요. 그만큼 수도권 이내가 아니면 학과를 불문하고 신입생을 모으기 어렵습니
다. 하물며 국어국문학과는 어떻겠습니까.” 박기수 교수는 “교수들 중에는 수년 내 수원까지 그 범위
가 확대될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내놓는 분도 있다”고 말했다. 국어국문학과의 변신에 적극 앞장서
고 있는 대학들이 대개 지방대, 그 중에서도 (정부에 대한 재정 의존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립대인 것
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권 대학이라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입장은 아니다.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인
40대 중반의 한 교수는 “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서울대 인문대는 연세대 의대보다도 커트라인이 높았
다. 그런데 요즘은 전국 모든 의대 커트라인보다도 훨씬 낮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커트라인이 낮아지
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과 정원이 줄어드는 사태까지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문학의 변신에 관해서는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성교(75) 성신여대 국어국문
학과 명예교수는 “지금과 비슷한 논쟁이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에 성신여
대 인문대학장을 했어요. 그때 교양 과정에서 국어를 없애는 문제로 한창 논쟁이 벌어졌지요. 당시 내
옆에 화학과 모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 ‘학장님, 국어 그거 애들 작문이나 하는 과목 아닙니까?’ 그래
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목이 쉴 정도로 국어의 당위성을 주장해 결국 관철시켰습니다.”

김선학(63)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매 학기 첫 번째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쪽지를 나눠주고 ‘삼
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한자로 써 보게 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이 ‘삼국사기(三國史
記)’는 제대로 쓰지만 ‘삼국유사’는 ‘三國有史’로 쓴다고 한다. 그는 “한글로 쓰면 되는데 왜 굳
이 한자로 써야 하느냐”는 학생들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요즘 국어국문학과의 위기를 돌아본다고 했다.
“남겨진 여러 가지 일이라는 유사(遺事)의 뜻을 알아야 삼국유사의 야사적 특성과 저자 일연의 집필 의
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요. 국어국문학의 존재도 한자 같은 것 아닐까요? 당장 없어도 불편하지 않
다고 해서 없애버리겠다는 공리적 발상은 위험합니다.”

조선 중기 고전문학을 전공한 정소연(31)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서울대 국문학 박사)는 조선시대 학자
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이른바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에 빗대 요즘 상황을 해석했다. “문이재도
론에서는 문(文)은 도(道)를 담는 그릇이라고 봤습니다.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은 내용물(道)이고 그
걸 담는 그릇(文)은 비본질이라는 뜻이에요. 이 논리에 따르면 정통 국문학은 전자, 최근 각광 받는 문
화 콘텐츠나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후자가 아닐까요? 결국 비슷한 논란이 시대가 바뀌면서 계속 되풀이되
는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바뀔 뿐, 그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평
행사관’이죠.”

‘국문학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쪽의 반론도 팽팽하다. 이들 주장의 가장 큰
주제는 과거 수십 년간 이어져온 국어국문학 고유 영역의 축소다. 국어 교사는 국어교육학과에, 언론 분
야는 신문방송학과(언론정보학과)에, 창작 영역은 문예창작과에 빼앗겨 ‘국어국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진출할 수 있는 직업의 폭이 갈수록 좁아진다는 논리다.

특정 시대와 인물, 장르에 한정된 전공을 가진 몇 명의 교수진이 국어국문학의 방대한 커리큘럼을 깊이
있게 소화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정해진 시간에 너무 많은 내용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
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졸업하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부생의 급격한 감소 역시 기존 국어국문학과로서는 ‘이상 신호’다. 수도
권 대학의 한 국문학과 교수는 “옛날엔 1~2학년 때부터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학생이 나오곤 했는데 요
즘 국문과 우수 졸업생들은 국문과 대학원이 아닌 통역대학원에 가겠다고 한다.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며 “우수한 학생이 대학원으로 안 오는 것은 해당 학과로서는 굉장히 위험한 신호”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문학의 변신을 주장하는 학자들조차도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아류 국문학과’의 등장은
달가워하지 않는 입장이다. “디지털 콘텐츠 부문은 역사가 오래지 않아 전문가층이 굉장히 얇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40대 이후는 없다고 봐야 해요. 나머지는 이름만 바꿔 활동하는 거죠.”(한혜원 교수)
“시중에 나와 있는 문화 콘텐츠, 디지털 스토리텔링 관련 책의 90%는 가짜예요. 제대로 된 분석 없이
껍데기만 바꾼 거죠. 이쪽 분야는 철저하게 실용성, 현장성 위주로 움직이기 때문에 업계 쪽 전문가가
상당히 많습니다. 오히려 학교 쪽에는 제대로 된 전문가 집단이 적은 편이에요.”(박기수 교수) 특히
박 교수는 “문화 콘텐츠 분야는 국문학뿐 아니라 사학, 철학 등 모든 인문학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
간힘을 쓰고 있다”며 “분야 간 협업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각 전공들이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식의 지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어 제대로 된 연구 성과가 나오기 힘든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국문학의 경쟁력은 이야기… 계속 발전시켜야”
안경환 비아이그룹 제작본부장은 9월 초 종영된 MBC 애니메이션 ‘먹티와 잼잼’을 기획, 제작했다. 대
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업계에서 오랫동안 실무 경력을 쌓은 그 역시 서울산업대와 세종대에서
디지털 콘텐츠 관련 교양 강의를 진행한다. 그의 수업을 듣는 수강자의 40%는 국문학 전공자다. “사실
디지털 콘텐츠 분야에서 국문학이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은 일부분이에요. 물론 매체 환경이 디지털로 바
뀌면서 콘텐츠 성격도 달라져야죠. 그렇지만 콘텐츠 탑재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원천 소스를 개발하는
것이고, 그게 국문학의 영역이에요. 농사로 따지자면 괭이나 호미를 만드는 대장장이 같은 역할이랄까
요?” 안 본부장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하는 한국의 문화원형사업에서 ‘한국의 호랑이’ 편
에 참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설화나 전설, 민담 속의 호랑이 캐릭터와 관련 이야기를 찾아내 그걸
애니메이션, 삽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작업의 시작은 늘 인문학자들이
에요. 그 분들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일이죠.”

설기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기반조성본부장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
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중 ‘드라마티카(Dramatica)’라는 게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과 대강의 이야
기 줄거리를 집어넣으면 자동으로 해당 캐릭터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사용자의 의도에 맞게 플롯을 체계
화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지요. 그렇지만 그게 창작의 끝은 절대 아닙니다. 기본 도구일 뿐이에
요.” 그는 외국에 비해 빈곤한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탄탄하지 못한 인문학 교육에 있다고 믿고 있
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 ‘디지털’은 언젠가 더 좋은 기술이 나타나면 변하겠죠. ‘텔링’ 역시
진행형이므로 변할 수밖에 없고요. 결국 변하지 않는 본질은 ‘스토리’, 곧 이야기이고 이걸 인문학에
서 해주어야 합니다.”

전공의 중심은 잡되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최혜실(45)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요한(계시자)’ 같은 존재로 통
한다. 그는 1999년 ‘디지털 시대의 문화예술’이라는 책에서 ‘문화기술(CT)’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
하며 문화관광부 주도로 ‘문화 콘텐츠’라는 용어가 만들어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문광부 산하기
구인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 문화원형사업의 기본 틀을 만들어준 것도 최 교수였다. 그는 카이스트 인
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있던 2001년 원광연 당시 카이스트 전자전산학과 교수와 함께 세계적으로 디지털
스토리텔링 관련 과목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 관련 교재를 만들어 전국 대학에 배포하며 ‘디지털 스토
리텔링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랬던 그가 2004년 12년간의 카이스트 생활을 접고 경희대로 돌아왔
다. 타이틀은 ‘국어국문학과 교수’였다.

“스토리텔링의 베이스는 인문학이에요. 제가 처음 카이스트에서 스토리텔링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여기
저기서 엄청난 주목을 받았죠. 그렇지만 이공계 베이스에서 국문학은 수단이고 착취의 대상일 뿐이에
요.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죠. 스토리텔링의 자양분은 인문학에서 발전해 뿜어져 나와야 하고, 그러려
면 스토리텔링 과정에서 인문학자가 대접을 받아야 해요.”

국문과로 돌아온 지 3년째, 그는 여전히 국문과에 불만이 많다. “요즘 같은 하이브리드 시대에 자기 학
과의 정체성에 집착한다는 건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일이에요. 전공의 중심은 잡되 새로운 시대에 적응
할 수 있어야죠. 내가 우리 과에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고 하면 아직도 어떤 교수는 ‘이런 건 언론
정보학과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일종의 순결주의죠. 계속 이렇게 가면 국문과의 영역은
자꾸 축소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국어국문학과 내 한 분야로 정착시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
다. “어떤 이는 기술에 약한 국문학 전공자가 어떻게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하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
런 논리로 따지면 이공계 전공자도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어요. 양자가 결합해야죠.
지금은 디지털 기술이 워낙 새로운 분야이기 때문에 기술 쪽에 더 방점이 찍혀 있지만 조만간 달라질 겁
니다. 영화를 발명한 건 에디슨이지만 훌륭한 영화를 만든 건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잖아요.”

최혜실 교수는 1997년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있었다. “그때 제일 놀랐던
게 하버드대 영어영문학과의 규모였어요. 우리로 치면 국어국문학과에 해당하는 ‘department of
literature’와 ‘department of linguistics’가 있긴 한데 제일 작고 볼품없더라고요. 캘리포니아나
버클리 쪽 대학에서 영문학은 철저하게 미디어와 결합해 영화 시나리오 작법이나 문화학(culture
studies)으로 흡수됐죠. 나라 뺏기고 언어 뺏긴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국어국문학이 각별한 건 사실이지
만 우리도 머지않아 미국식으로 갈 겁니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서 배운 전공으로 평생 먹고살 수 있
어야 그 학문이 가치로운 것”이라며 “인문학 분야의 연구 결과를 정량화해 정당하게 평가 받을 수 있
도록 하고 불필요한 순결주의를 버리면 국문학에도 미래는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재미있는 뉴스 두 가지를 들려주었다. “서울대 인문사회 계열에서 문화 콘텐
츠 취업 박람회를 연대요. 서울대 철학과에서는 인문학 최고경영자 과정을 만들었다고 하고요. 놀라운
변화 아닌가요?” 그는 “지금 완고해 보이는 몇몇 대학 인문학과들도 조만간 바뀔 것”이라고 자신했
다. “이미 징후가 나타나고 있잖아요, ‘(더 이상) 못 살겠는 과’ 중심으로. 자기 학과가 폐과될 지경
에 이르면 누구나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어요.”

/ 최혜원 기자 happyend@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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