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컬트 여행지](15) 에티오피아 랄리벨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04-19 오전 9:30:00
아름답고 정숙하며, 지혜롭기로 소문난 시바의 여왕이 있었다. 여왕이 다스린 시바 왕국은 기원 전 10세
기 무렵 건설됐다고 전해지지만, 실존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는 상황이므로, 굳이 시대는 따질
것 없다. 그저 먼 옛날이라고만 하자. 여왕은 여권이라고는 ‘쥐뿔’도 없던 시대에 태어나 그 아름다움
과 카리스마로 주변을 제압한 보기 드문 여장부였단다. 위대한 제왕으로 추앙받은 솔로몬왕도 그녀의 명
성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

시바여왕은 무려 800마리나 되는 낙타에 갖가지 금은보화를 싣고 방문길에 올랐다. 막상 방문을 허락한
솔로몬왕은 내심 불안했다. 시바 왕국은 이교도들의 나라. 시바 여성들은 염소 발굽을 지녔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염소 발굽이라니! 그렇다고 대놓고 ‘당신 발 좀 봅시다’ 할 수도 없는 일.
한 ‘꾀’ 하시는 솔로몬 왕, 왕궁으로 들어오는 길을 물이 흐르는 것처럼 꾸며, 여왕이 치맛자락을 걷
어 올려 발을 드러내게끔 만들었다. 염소 발굽은커녕, 얼굴처럼 고운 발이었단다.

서로의 지혜에 감탄한 남녀는 어느덧 호감을 느끼게 됐더랬다. 숫처녀였던 여왕은 순결을 지켜준다는 조
건 하에 1년여를 왕 곁에 머무르는데,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왕의 계략에 넘어가 결국 동침
을 하기에 이른다. 이미 사랑에 빠진 사이니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동침
의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 메넬리크 1세. 우리로 치면 단군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
제다.

그런데 이 아들, 아버지 뒤통수 한번 제대로 쳤다.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성궤를 몰래 빼돌린 것이
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다는 십계명을 새긴 석판을 보관한 궤, 그 귀중한 보물을 말이
다. 성궤를 도난당한 솔로몬왕은 노발대발했으나 어쩔 것인가, 아들이 가져갔다는데. 자신의 아들이 성
궤를 빼돌려 차지할 정도로 지략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곧 평상심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죽기
전 자신의 친위대를 에티오피아로 보내 성궤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솔로몬 왕이 보낸 성궤 친위대의 전통은 비밀리에 전수되어, 현대에까지 남모르게 성궤를 지키고 있단
다. 전사로 지목된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철저히 교육받아 성궤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전혀 두려
워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비밀 결사대로 살아간다나.

물론 이 모든 것은 전설이며, 지역마다 혹은 학자마다 각기 다른 스토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스스로 솔
로몬왕의 지혜와 시바여왕의 미모를 물려받은 선택받은 민족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긍심의 원천이요, 정체성을 결정짓는 정신적 기둥이다. 하나
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자신들이 시바의 자손임을 자랑스레 여기며, 에티오피아 어딘가에 숨
겨져 있다는 성궤와 성궤 지킴이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산다.

에티오피아 제1의 성지로 추앙받는 랄리벨라는 전설을 진실로 다가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 커다란 바위
산을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깎아내려가 건설한 성소. 종교와 관계없이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는 작품이
다. 종교의 대상이 무엇이든 진지한 믿음 없이는 결코 건설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작품이며, 신에 대한
인간의 경외감이 얼마나 극렬한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엄숙함이 존재한다. 화산재가 굳어
져 만들어진 부드러운 응회암이었기에 이러한 대 공사가 가능했다는 가이드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도 않는다. 총 열한개의 교회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미로 같은 길을 하나의 바위를 깎고
다듬어 만들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가장 널리 알려진 베트 기요르기스 교회는 독특한 십자 모양의 아름다움으로 순례객을 압도한다. 땅 위
에서 바라보는 십자가 모양의 독특한 지붕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
다. 기거하는 성직자들의 성경 암송 소리가 교회 벽을 아름답게 두드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흰옷을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에게도 랄리벨라는 쉽게 제 품을 내놓지 않는다. 해발 2800m에 위치한 이곳은 번듯한 도
로 하나 만들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하기 그지없다. 자신을 보고 싶거든 험난한 여정과 시간을 감수해
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냐며 고개를 한껏 치켜세우고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매혹
녀 시바의 여왕인 양.

에티오피아에는 성궤가 안치되어 있다는 교회가 수십 개가 넘는다. 랄리벨라의 십자가 교회에도 성궤가
보관되어 있다는 지성소가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성
궤는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고 큰 환란을 일으킨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궤를 탐하고 성궤의 권세를
탐하는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욕심을 버릴 기미가 없다.

성궤는 에티오피아의 수많은 교회 어딘가에, 성궤 지킴이의 소명을 갖고 태어난 비밀 결사대에 의해 조
심스레 보호되고 있을 것이다. 성궤를 탐할 그릇조차 되지 못하는 소심한 여행객인 나는, 이 아름다운
랄리벨라의 십자가 교회 지하 동굴 어딘가에서 숀 코넬리보다 멋지고 근사한 성궤 지킴이가 그 소임에
충실하며 늙어가고 있겠거니, 그렇게 상상할 따름이다.

시바 여왕은 성경뿐 아니라 코란에도 ‘빌키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현재 발굴 중인 예멘 유적지
마람 빌키스 사원은 시바 여왕의 실존 증거가 드러날지 모른다 하여 고고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
다. 하지만 나는 성경과 코란, 마람 빌키스의 유적지보다, 자신의 검은 피부 때문에 솔로몬 왕에게 버림
받지 않을까 고민했다는 여왕의 이야기가, 여왕을 사랑하지만 종교 때문에 그녀를 버릴 수밖에 없던 솔
로몬 왕의 고뇌가, 도둑질한 아들에게 군대까지 지원해 준 아버지로서의 솔로몬 왕이, 훨씬 더 전설에
신빙성을 더하는 듯하다. 영웅호걸도, 절세 미인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걱정거리를 떠안고 살았
던 인생이었음에 위로받는다. 그러기에 더욱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랄
리벨라는 묵묵히 순례객을 기다린다. 시바여왕을, 솔로몬 왕을, 그리고 비밀 결사대와 성궤의 비밀을 품
고. 그렇게 랄리벨라는 또 다른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 전설 찾아 가는 길
에티오피아 악숨에서 랄리벨라까지 에티오피아 항공이 다닌다. 약 40분 소요. 비행시간은 유동적이므로
사전에 체크해야 한다. 에티오피아 항공의 마일리지 적립 프로그램 이름은 ‘시바 마일스’다. 버스로
이동할 경우 직항 코스가 없어 돌아가야 하고, 길이 험난하여 2~3일 정도 걸린다.

랄리벨라 내엔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다. 공항에서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가이드 투어가 일반적이다.
제대로 된 가이드를 만나는 것은 필수. 자격증 소지 가이드가 아니면 헛돈 날리기 일쑤다.

에티오피아는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어 크리스마스가 13일 늦다. 1월 크리스마스 시즌에 랄리벨라를 방문
하면 ‘틈캇’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황량한 랄리벨라는 숙소조차 마땅치 않아 화장실도 없고 샤워도
불가능한 허름한 쪽방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밤새 열리는 축제에 동참하다보면 숙소의 불편함 따위
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글·사진 조정연|여행칼럼니스트 www.chojeongye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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