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원짜리 여행 버스타고 종점까지 창 밖 세상 구경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5-10-20 오전 9:41:00


[조선일보 박근희, 김승완 기자]

버스를 탑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탈 때와는 기분이 다릅니다. 학교 가는 길, 돈 벌러 가는 길, 생활
의 현장으로 가는 길과는 다릅니다. 종점까지 갔다 오는 800원짜리 여행입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세
상 구경하는 시간입니다. 버스 타고 가는 순간만큼은 그 야단법석 활력을 그저 멍하니 구경해도 됩니다.

서울역 앞.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서 일부러 길을 잃었다. 마침 지나가던 202번 시내 버스에 몸을 실었
다. 노선은 ‘불암동-청계천-후암동’. MP3를 귀에 꽂고 맨 뒤 가장 자리에 앉는다. 버스 출발과 함께
천천히 흐르는 캐논 변주곡. 저음에서 고음, 고음에서 다시 저음을 반복하는 선율에 따라 길이 오르락내
리락 나 있는 듯한 착각.

버스는 두어 정거장을 지나자마자 후암동 기점에 도착한다. 앞 정거장에서 타서 기점을 돌아 나가는 사
람들도 있기 때문에 굳이 안 내려도 된다. ‘해방촌 고개’를 끼고 있는 후암동 기점은 중구난방 간판
이 요란하다. 여기에 만물 노점이 소란스러움을 더한다. 서울역, 남대문, 명동을 숨 가쁘게 빠져나오면
이내 청계천이다. 좀 막히지만 천변 산책길을 따라 걷는 사람 구경이 재미있다. 청계천 새 단장 이후 정
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버스 기사는 푸념한다. 202번 버스는 총 90개 정거장을 거친다. 평상시라면 3
시간 정도 소요된다. 물론 중간에 행사나 집회를 만나면 기약이 없다.

황학교 앞에서 왕십리 방향으로 우회하자 어디에선가 흘러든 고소한 냄새 따라 코가 절로 벌름거린다.
그 유명한 왕십리 곱창 골목이다. 저마다 ‘원조’라고 써 붙인 간판들이 요란하다. 간이 테이블 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있다. 조금 더 달리자 제기동 약령시장과 재래시장이 이어진다. 리어카에 쌓아놓
은 알 굵은 밤 때문에, 단물 꽉 찬 홍시 때문에 가을 시장의 흥정 소리가 높아간다. 청량리를 지나 중랑
교, 묵동 일대를 지나면 화랑로 왕복 8차선 플라타너스 길이다.

버스 기사도 이제야 여유를 찾았는지 차창을 열어젖힌다. 남양주시 별내면 종점은 행정구역 상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라지만 ‘한 줄로 서시오’라는 녹슨 푯말이 딱 시골 종점 풍경. 버스에서 내려 불암산을
바라보며 잠시 큰 숨을 들이켜 본다. 오후 한 나절, 짧았던 외출의 추억을 가슴 깊숙이 담았다면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출차를 알리는 버스의 경적 소리가 일상으로의 복귀를 재촉한다. 서울 시내버스
교통카드로 서울역~불암동 종점까지 800원. 내렸다 30분 이내에 다시 타면 환승 할인 받는다. 이후 내리
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추가 운임이 들 수 있다.

(글=여성조선 박근희기자 [ yay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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