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네오 트로트｜트로트의 생명력

트로트, 즉 ‘유행가’가 유행을 넘어, 시대를 건너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 노래방 애창곡 순위나 한국
인이 좋아하는 애창가요 베스트 집계에서도 여전히 강세다. 속칭 ‘흘러간 가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다. 옛 노래를 들려주는 TV프로 ‘가요무대’가 20여년째 장수하고 있고,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도
이미 유행이 지난 수십 년 된 노래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불과 3분짜리 유행가 가사를 시대별로 훑어
가다 보면 거기에 한국 근대사가 큰 그림으로 자태를 드러낸다. 당대 시대상과 생활상이 고스란히 투영
되어 있는 것이다.

“‘흘러간 가요’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흘러온 가요’라고 해야지.” 이는 원로 작사가 반야월
(90) 선생의 주장이다. 서민의 입에서 입으로 흘러온 노래, 그 큰 줄기가 바로 ‘트로트’다. 특히 어려
울 때일수록 절절하게 들렸던 트로트 가락은 우리 삶의 동반자였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며 국민에게
크나큰 위안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주었다. ‘지쳐있는 삶의 응원가’였다.

최근 들어 ‘성인가요’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트로트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우리 가요’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트로트(Trot)’는 원래 동물의 걷는 속도에서 비롯된 리듬을 뜻하고 일
본 엔카의 영향을 받았다. ‘가요무대’의 연출자 오진규(52) PD는 “지금까지 트로트가 우리 가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차치하고라도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의 상당수가 트로트 가수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국
악과 더불어 세계에 한국 음악을 알릴 때 가장 먼저 소개되어야 할 장르 중 하나”라고 말했다.

1985년 11월 첫 전파를 탄 이래 20년 넘게 장수하고 있는 ‘가요무대’의 인기는 특히 해외동포에게 압
도적이다. 세계 구석구석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을 연결할 수 있는 소중한 끈이 바로 우리 가요인 셈
이다. 옛 노래가 ‘마음의 고향’ 역할을 해줄 수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오 PD는
“1970~1980년대 대학 다니며 통기타 음악에 빠졌던 세대도 이제는 트로트 음악을 즐겨 부른다”며 트로
트의 생명력을 가사와 멜로디에서 찾고 있었다.

1930년대 작곡가 손목인과 박시춘의 등장은 우리나라 민요 자리에 대중가요가 들어서게 되었음을 의미했
다. 본격적인 트로트 시대의 개막을 알린 작품은 1934년에 발표된 고복수의 ‘타향살이’ 그리고 이듬
해 발표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이어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과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
막’ ‘나그네 설움’ 등으로 맥이 이어진다.

트로트 가요가 한국인에게는 어떤 의미로 작용할까. 한 예로 ‘목포의 눈물’을 살펴보자. 일제하 1935
년에 발표된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망향가’이자 ‘저항가’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 받는 호남인의 ‘시름가’였다. 그리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장렬히 산화한 열사에 대한 남도인의 ‘진혼가’가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목포의 눈물’
은 호남인의 입에 마치 세발낙지처럼 착 달라붙은 채 심지어 프로야구장에서 응원가로까지 불린다. 이것
이 트로트가 발휘하는 생명력이다.

일제하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애수의 소야곡’과 ‘나그네 설움’,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린 나라를 한
탄한 ‘번지 없는 주막’과 ‘타향살이’,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귀국선’, 6·25의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전쟁의 폐허에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굳세어라 금순아’, 부패
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귀거래사를 읊은 ‘물방아 도는 내력’ 등 우리 가요는 트로트 리듬을 타고 격
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국민과 함께 해왔으나 그 스스로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1950년대 보릿고개 시
절 ‘도롯도’시대를 거쳐 1960년대 ‘트로트’는 정치인에 의해 재갈이 물려진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그 반대로 홍보의 최전방에서 첨병 노릇을 하기도 했다.

트로트를 중심으로 한 가요의 영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정책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시기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다. 박 전 대통령은 5·16 이후 ‘저속’ ‘왜색’ 등의 이유로 무더기로 금지곡
을 양산했고 남은 노래도 ‘퇴폐’를 이유로 모두 2절까지만 방송케 했다. 그러나 ‘동백아가씨’ 등을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시킨 뒤 개인적으로는 가수 이미자를 청와대로 불러 육성으로 감상했던 것 또한
유명한 일화다. 또 자신이 ‘금오산아 잘 있거라’의 노랫말을 지어 가수 박재홍에게 취입시키기도 했
다.

초창기 트로트는 대부분 3절로 구성되어 ‘기승전결’의 이야기 흐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에 의해 잘려 기형이 된 트로트는 1970년대 들어 ‘팝 트로트’, 1980년대에 ‘포크 트로트’ ‘이지 트
로트’ ‘댄스 트로트’ 등으로 세분화하며 변신을 계속했다.

1981년엔 ‘트로트 메들리 붐’이 한국을 강타했다. 당시 미국에서 ‘스타스 온 45’(Star's On 45)라
는 타이틀을 달고 특정 가수의 히트곡 45곡을 모아 한 장의 음반에 수록하는 조류가 한국에 상륙해서 메
들리로 된 것이다. 노래를 1절씩만으로 엮어 대부분 템포 빠른 댄스곡으로 편곡돼 보급된 ‘트로트 메들
리 붐’은 ‘뽕짝’이라는 비속어를 탄생시켰다. 기본적으로 2박자와 4박자 패턴인 ‘쿵/짝(강/약)’ 리
듬이 열악한 녹음시설과 재생기기로 인해 사람들 귀에는 ‘뽕짝’으로 들렸던 것이다. 메들리 붐과 함
께 일부 ‘트로트 가요’는 ‘관광버스용’으로 치부되며 ‘뽕짝’으로 둔갑했지만, 우리말 의성어 ‘뽕
짝’은 ‘트로트’를 대신하는 용어로 빠르게 회자됐고 급기야 영국에서 발행되는 ‘러프 가이드(Rough
Guide)’ 월드뮤직 편에서는 한국의 대표적 대중음악을 ‘뽕짝록(Pongchak Rock)’이라 소개하기도 했
다.

언젠가 한 모임에서 이렇게 불려지는 노래를 들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저 바다가 없었다면/ 누가
울어 이 한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며/ 내가 왜 왔나/ 울어라 열풍아/ 갈대의 순
정’. 기존 노래의 부분을 조합해 하나의 노래로 연결시킨 이 노래의 가사는 앞뒤가 맞지 않지만 멜로디
의 연결성만큼은 그럴 듯해 한두 번만 들어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단 한 차례 들었을 뿐인
데도 필자가 10년이 더 지난 시점인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만큼 말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찬찬히 뜯어보면 ‘비 나리는 호남선(손인호)/ 가슴 아프게(남진)/ 누가 울어
(배호)/ 추풍령(남상규)/ 울려고 내가 왔나(남진)/ 울어라 열풍아(이미자)/ 갈대의 순정(박일남)’을 이
어붙인 것이다. 이는 1957년부터 1968년까지 10여년에 걸쳐 발표된 노래다. 그럼에도 마치 장인이 꿰맞
춘 목조건물인양 조합이 척척 들어맞는다. 만일 1930년대 ‘애수의 소야곡’에서 최근의 ‘남자라는 이
유로’까지의 노래를 꿰어 조합해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것이다.

그만큼 트로트 가요의 멜로디 전개는 서로 흡사하다. 이 때문에 트로트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이미 알
고 있던 노래’인 것 같은 친근함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노래가 그 노래’라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변신을 꾀하던 트로트가 최근에는 ‘네오 트로트’시대를 맞았다.

“요즘 노래는 템포가 지나치게 빠르고 창법이나 노랫말이 가벼워 감정을 이입할 여지가 없어요. 노래
가 그저 소모품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1980년대 메들리, 1990년대 테크노 시대
를 거치면서 어느덧 ‘리듬이 가사보다 앞선 시대’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하는 작사가 지명길(65) 한국
음악저작권협회장은 전통적인 한국 트로트에는 ‘여백의 미’가 있어서 그 ‘빈 곳’에 대중이 감정을
이입시키고 노래의 맛을 음미할 ‘여지’가 있었는데 요즘 주류를 이루는 가요의 대부분에는 몰입할,
즉 ‘듣는 이의 몫’이 없다고 지적한다.

‘노래방 문화’로 인해 ‘듣는 노래에서 부르는 노래’로 음악 수용의 형태가 급격히 이동한 것도 이러
한 현상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점차 노래 한 곡의 가사를 모두 외우는 사람은 드물어져 간
다. 음반이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으로 전락했듯이 노래 역시 ‘한번 부르고 버리는 시
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1964년 ‘동백아가씨’를 통해 비로소 우리나라 트로트 시대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트로트의
여왕’ 이미자(66). 한국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가장 많은 곡을 취입한 그녀는 악보 그대로 노래를 부
르는 ‘원곡주의자’다. “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는 리듬이 빠르고 장난스럽기까지 합니다. 너무 뒤집고 굴리는 등 감각이 전혀 다
른 트로트가 성행해 점차 진정한 의미의 전통가요가 소멸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그녀는 “노
래에는 만든 이와 부르는 이의 혼이 담겨야 한다”면서 한국 전통가요의 멋과 정서를 강조한다.

이미자는 해외공연시 경비 문제로 전속악단이 모두 동행할 수 없으면 현지에서라도 드럼, 기타, 베이스
연주자만큼은 반드시 한국인 연주자로 구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같은 악기를 다뤄도 외
국인은 ‘쿵짝 쿵짝’하는 우리 트로트만의 맛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요. 역시 트로트에 들어있는 한국
인만의 정서, 즉 ‘핏줄’의 힘은 무서운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 ‘저항가요’로 출발해 서민의 젓가락 장단에 실려 기쁨과 슬픔을 대신하며 ‘영욕의 세월’
을 건너온 트로트.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국민과 함께 했던 트로트 가락은 음악적인 평가 이전에 우리
삶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