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에게 배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5-09-12 오후 12:05:00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태풍의 계절이다. 지금 창밖에는 제14호 태풍 ‘나비’의 날갯짓이 스
치듯 지나가고 있다. 지지난해 ‘매미’로부터 심한 상처를 입었던 우리로선, 이번 태풍 이름도 같은 곤
충 종류라 잔뜩 긴장했던 터다.

밥을 먹다가도 위성에 찍힌 태풍 사진이 텔레비전에 비치면, 언제나 숟가락질을 멈추게 된다. 사람이 만
든 도시나 국가간의 경계 따위는 물론이고, 산이나 강 같은 자연의 경계조차 안중에 없는 듯, 대륙과 바
다를 온통 휘감는 거대한 회오리 모양은 넋을 빼놓는다. 크고, 당당하고, 장쾌하다.

-눈의 기압 낮을수록 강력- 태풍은 보통 바람과는 다르다. 바람이 물처럼 흘러간다면 태풍은 빙산처럼
덩어리로 뭉쳐 움직인다. 바람이 흐르는 선(線)이라면 태풍은 펼쳐진 면(面)이다. 태풍을 덩어리처럼 만
드는 것은 그의 눈이다. 눈은 주변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면서 생긴 텅 빈 기둥이다. 눈이 없다면 태풍은
한낱 ‘열대성 폭풍’에 불과하다. 스쳐가는 일진광풍에 불과하다. 거대한 구름 회오리 한가운데에 뻥하
니 뚫린 태풍의 눈은 한밤중 마주친 고양이 눈깔처럼 섬뜩하다.

한데, 수백년 묵은 나무의 뿌리를 뽑고, 깊은 강을 범람케 하고, 산기슭에 사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
는 태풍의 힘 역시 눈에서 비롯된다. 흥미로운 것은 태풍의 눈 속이 고기압이 아니라 저기압이라는 사실
이다. 더욱 묘한 것은 눈의 기압이 낮으면 낮을수록 태풍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는 역설이다. (태풍 ‘매
미’의 힘이 전설적인 ‘사라’보다 강했던 이유는 매미의 중심기압이 더 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강한 힘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압력이거나, 높은 지위로 사람을 움직이는 권력이 아니라 도
리어 스스로를 낮출 때 발생하는 힘, 곧 매력에 있다는 점을 태풍은 가르친다. 그러니 태풍의 눈은 분
명 여성적이다. 주변에 강한 구름과 바람을 거느린 ‘다소곳한 여왕벌’이다. 태풍에 여성의 이름을 붙
이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또 한 가지 태풍의 특징은 누워있지 않고 곧추서 있다는 점이다. 바람이 비스듬히 흘러간다면, 태풍은
꼿꼿하게 서서 움직인다. 태풍이 설 수 있는 것도 그 눈 때문이다. 속의 한가운데, 즉 심이 비었을 때에
야 비로소 직립하게 된다는 사실을 태풍은 가르친다. 어디 사람인들 다르랴.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립하
기 위해선 속을 텅 비워야 하는 것이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靜中動) 까닭도 속을 비워냈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렇다면 한 시인의 통찰이 여기서 멀지 않다.

파가 자라는 이유는/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파가 커갈수록/하얀 파꽃 둥글수록/파는 제 속을 잘 비
워낸 것이다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속이 없다(이문재, ‘파꽃’) -낮출 줄 아는 겸손의 매력- 그렇
다. 파든, 태풍이든, 사람이든 ‘꼿꼿하게 홀로 선’ 것은 오직 속이 텅 비었을 때만이다. 아니다. 모
든 힘 있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야 한다. 소리를 내는 악기마저 그러하다. 피리든, 오카리나든, 기타
든, 캐스터네츠조차도 속이 비지 않고선 소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 즈음에 태풍으로부터 자립의 길을 배운다. 우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곳,
아니 계곡처럼 깊은 곳에 거처해야 한다. 또 상대를 배려하는 몸짓에서 눈의 싹이 트고 주변의 힘이 내
게 몰려들 때 그제야 속은 비고 눈은 또렷해진다. 그러면 곧추서게 되고, 반듯이 서면 비로소 높은 곳
(고기압 쪽)으로 움직여 나아간다.

그러고 보니 이황 선생의 호가 퇴계(退溪)였다는 점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퇴계란 ‘계곡으로 물러나
앉는다’는 뜻이다. 그 속엔 자립을 위해 ‘낮은 곳으로 물러선다’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다. 그러
나 그의 물러섬은 물러남에 머물지 않고 끝내 조선의 지성사와 정치사를 크게 변화시켰으니, 태풍의 힘
과 그 눈의 내력을 일찌감치 알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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