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폴 란드 대통령이 프랑스 낭시에서 만났다. ‘유럽이 강해지려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해 온 이들 이 열흘 뒤 유럽 헌법에 대해 찬반을 묻는 프랑스의 국민 투표를 앞두고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한자리 에 모인 것이다.
낭시는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의 중심지다. 독일 접경의 ‘알자스로렌’, 바로 그 로렌이다. 이곳은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보불전쟁·1870∼1871) 끝에 빼앗겼다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되찾은 땅이 다. 우리에게는 알퐁스 도데(1840∼1897)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이날 아침. 삼국 국기와 유럽연합(EU)의 깃발로 치장된 스타니슬라스 광장을 뒤로하고 낭시 역에서 기차 에 올랐다. 파리까지 2시간 40분. 도중 이런 생각을 했다. 시라크 대통령이 낭시에서 회동을 가진 이유 가 뭘까. 분명한 것은 ‘스타니슬라스 광장’의 홍보다.
낭시 중심부에 있는 이 광장은 이 도시의 랜드 마크로 250년 전에 만들어졌다. 네모 형태의 광장 주변 을 장식한 18세기 건축물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 로코코 형식의 이 건물들은 900만 유로(약 111억 원)를 들인 대대적인 보수공사 덕분에 깔끔하게 단장됐다. 광장 바닥 도 새 돌로 단장됐고, ‘황금의 문’과 분수, 개선문은 화려하게 바뀌었다.
이런 모습은 시라크 대통령 등 세 지도자가 광장을 무대로 등장하면서 뉴스 카메라를 통해 세계로 중계 됐다. 시라크 대통령은 이번 회동을 계기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낭시와 로렌의 관광 산업을 부흥시 키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성공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프랑스혁명 직후 알자스로렌 주민들은 독일과 프랑스 중 귀속될 국가를 선택하는 투표를 했다. 그 결과는 프랑스. 당시 독일은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프랑스를 선택하면 혁명 의 성과를 누릴 수 있었으니.
시라크 대통령이 그 투표를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유럽 헌법에 대한 찬성을 호소하려는 회동 장소로는 알자스로렌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낭시는 알자스로렌 지역이 독일에 편입된 뒤 발생한 유민이 조성 한 도시다.
낭시는 인구 10만의 소도시. 파리에서 출발한 철도가 프랑스 땅이면서도 독일어 지명인 스트라스부르(알 자스의 경제 문화 중심지)로 가는 도중에 있다.
스타니슬라스 광장은 낭시의 지리 문화 경제의 중심이다. 스타니슬라스(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퇴 위한 폴란드 왕으로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장인이다. 그는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와 부르봉(프랑 스)왕가가 1783년 체결한 빈 협약 덕분에 알자스로렌 지역을 맡았다. 그 협약은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 레지아 여왕이 로렌 영주 프랑수아(훗날 프란츠 1세)와 결혼하고 로렌은 스타니슬라스에게 인계한다는 것이었다.
스타니슬라스는 사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광장에 루이 15세의 동상을 세우고 ‘황제의 광장’이라고 이름붙였다. 사위는 애초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곧 죽을 줄 알았던 59세의 장인 이 30년 더 산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동상은 프랑스혁명 때 끌어내려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장인 의 동상뿐 아니다. 이름마저 장인에게 빼앗겼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광장 주변, 화려한 18세기 건물에는 오페라하우스, 호텔, 미술관, 시청 등이 들어서 있다. 이 중 그랜드 호텔은 결혼을 앞두고 루이 15세를 만나러 온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묵었던 곳이다. 19세기 말 낭시에 서 꽃피운 아르누보 양식의 유리 공예는 이곳 미술관 ‘뮈제 드 보자르’에서 감상할 수 있다.
광장의 백미는 다섯 개의 문 중 하나인 ‘황금의 문’이다. 검은 쇠창살을 황금 빛깔로 장식한 문으로 광장 네 구석에 있다. 두 모서리를 장식한 분수도 빼어나며, 광장 가운데 화려한 조각 장식의 개선문은 크기는 작아도 파리 개선문 이상으로 아름답다.
해질녘 광장은 붐빈다. 노을에 물든 광장 위 네모진 하늘을 감상하려는 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든다. 십자 로 광장 바닥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 그 빛을 받아 기하학적 패턴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밤의 광장. 이 모습은 황금의 문 옆에 있는 레스토랑 ‘르푸아’ 2층에서 봐야 제격이다. 낭시의 홈팀 ASNL이 축구 경 기를 이기는 날이면 이곳은 팬들의 함성으로 뒤덮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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