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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박성우] 21일 서울의 유명 사립대 이공 계열의 한 강의실. 영어 강의인 이 수업에서 한국인 교수는 "next(다음)"라는 말을 반복하며 슬라이드 화면을 넘겼다. 이후 칠판에 난해한 화학공식만 계속 해 적었다. 학생들은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거나 노트 필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질문을 하는 학생도, 교수의 보충 설명도 없었다. 강의실엔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이어진 이 수업에서 "next" "equation(등식)" "sequence(수열)" 등의 짤막한 단어 만 거듭됐을 뿐 문장 수준의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학생들의 질문도 전혀 없었다.
수업을 들은 학생 박모(25)씨는 "영어를 써야 하니까 선뜻 질문하지 못하고, 교수님도 불편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날 인간의 행동양식과 관련된 이 대학 강의실. 교수가 "Why do some people date without problems?(왜 어떤 사람들은 문제없이 연애하나)"하고 질문하자 "The dates are different. (날짜가 다 르다)"는 엉뚱한 답이 나왔다. 교수가 '연애'의 의미로 사용한 'date'를 학생은 '날짜'로 해석한 것이 다.
대학의 세계화를 목표로 각 대학이 적극적으로 영어 강의를 늘리고 있지만 현실은 의욕을 따라가지 못하 고 있다.
연세대는 2007년까지 영어 강의 비율을 현재의 4%에서 30% 이상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고려대도 '글로 벌 KU 프로젝트'를 선언하고 현재 20%인 영어 강의 비율을 2010년까지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 혔다. 고려대는 지난해 신입생부터 졸업 전에 최소한 5개 과목을 영어 강의로 수강해야 한다. 다른 대학 들도 앞다퉈 영어 강의를 개설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21일 또 다른 대학에선 수강 안내 책자에 '영어 강의'라고 설명된 수업이 우리말로 진행되고 있 었다.
이 학교 학생 이모(24)씨는 "학기 초 한두 번 영어 강의를 시도했다가 학생들이 의사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해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 강의는 자료는 영어로, 말은 우리말로 하는 '타협안'으로 이뤄지고 있었 다. 이 대학의 한 단과대학장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 사람끼리 영 어로 강의하는 게 매우 어색하고 전달력만 떨어진다"면서 "일부 교수나 학생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할 만 한 실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영어 강의는 '최소한 B학점은 받을 수 있다'며 수강신청이 쇄도했다가 실제 수업에는 60% 이상이 불참하기도 한다. 영어 수업에서 영어가 많이 쓰이면 절반 이상이 수강을 포기하는 일도 벌어지 는 것이다.
이에 각 대학은 영어 강의 교수법을 연구하기 위해 별도의 팀을 만드는 한편 국제학부 등을 통해 영어 강의의 질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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