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밀림속에서 신을 낳은 도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9-22 오전 11:49:00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숨막히는 무더위와 열대림.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말발굽 소리를 내는 거센 빗줄기가 순식간에 지
상을 덮었다. 그것은 일종의 반란군이었다. 일상에 지친 갈증을 푸는 묘약인 동시에, 예고도 없이 엄습
해 오는 암흑세계였다. 모든 것들이 숨죽인 채 자욱한 빗속에 잠겼다. 그것도 잠시, 먹구름은 흔적 없
이 사라지고 다시 맹렬한 뙤약볕이 새 점령군이 되어 하늘을 장악했다. 그리고 짙푸른 하늘 밑으로, 천
년 세월을 비에 씻기고 햇살에 바랜, 엄청난 돌무더기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끊임없는 내전, 피로
얼룩진 캄보디아 역사처럼 스콜은 하루에도 몇차례씩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시엠립을 휩쓸고 지나갔
다.


앙코르 유적은 인간과 돌과 세월이 얽히고 설켜 저지른 거대한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이 무모해 보
이기까지 하는 돌더미 사원들은 9~15세기 인도차이나반도에 번성한 크메르제국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
수한 돌을 요철식으로 쌓아 만든 거대한 도시, 그 규모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돌에 스며 있는 인간의
숨결이었다.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들은 너무도 생생해, 감동을 넘어 고통스럽기조차 했
다. 돌을 껴안고 평생을 오로지한 장인들의 솜씨, 신권과 왕권에 바쳐진 노동의 흔적들이 핏빛처럼 빛
난다. 도성 주변을 장식했을 수많은 목조건축물들은 사라지고 오직 첩첩이 쌓인 육중한 돌들과 그것을
감싸고 뻗어나간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힌두교·불교문화가 교묘하게 결합돼 아로새겨진 앙코르 유적은 캄보디아 북서부 원시림 속에 자리잡은
인구 10만의 도시 시엠립 북부지역에 집중돼 있다. 반지름 20㎞의 원시림 안에 100여개의 크고 작은
석조 사원들이 몰려 있다. 앙코르 유적을 대표하는 사원이 시엠립 시내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앙코
르 와트다. 앙코르(도성·도시) 와트(사원)는 12세기 초 수르야바르만 2세 때 힌두교 세 신 중 하나
인 태양신 비슈누를 모시기 위해, 3만명의 일꾼을 동원해 37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폭 200m에 이
르는 해자로 둘러싸인 가로 1.4, 세로 1.5㎞ 크기로, 앙코르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전된 사
원이다. 들머리에서는 머리가 일곱 달린 코브라신 ‘나가’가 좌우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나가’
는 앙코르 유적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민족 수호신이다.

이 사원의 압권은 동서남북 4면에 높이 5m의 회랑 벽면을 따라 새겨진 부조 벽화다. 힌두교 2대 경전
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줄거리와 천지창조·사후세계를 묘사한 부조 등이 정교하게 새겨
져 있다. 3층으로 이뤄진 사원의 1층 회랑까지는 서민이 이용했고, 2층은 귀족이, 3층은 왕족이 참배
하던 곳이다. 각 층 회랑의 벽면마다 무수한 신들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2, 3층엔 각각 4개의 거대
한 욕조가 있는데 빗물을 받아 참배 전에 몸을 씻던 곳으로 추정된다. 각 층은 매우 가파른 돌층계로
이어진다. 특히 3층 중앙 사원으로 오르는 계단은 위험할 정도로 가파르다. 5개의 탑이 솟은 3층에서
입구 쪽으로 내려다보는 해넘이가 아주 아름답지만, 관람시간이 오후 6시까지로 제한된다. 나가는 길
에 참배도로 옆의 작은 연못 앞에 서면, 석양에 물든 채 물에 비친 사원의 모습이 황홀하다.

앙코르 와트가 힌두교 신들이 들어찬 단일사원이라면 앙코르 톰은 힌두교와 불교가 혼합된 양식을 보여
주는 일종의 도시다. ‘거대한 도성’이라는 뜻의 앙코르 톰은 안에 바이욘·바푸온 등 여러 사원과 왕
궁터·제단들을 거느린 가로·세로 3㎞에 이르는 성이다. 12세기 후반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건설됐
다. 54개에 이르는 관세음보살상로 장식된 바이욘(금탑) 사원의 1층 회랑 벽면엔 당시 서민 생활상이
생생히 묘사돼 있어 흥미를 끈다. 육군·수군의 전쟁 모습과 요리하는 아낙, 술 마시는 남자, 아기 낳
는 여성을 비롯해 각종 동물·물고기·거북 따위들이 사실적으로 조각돼 있다. 탑에 조각된 보살상들
은 하나같이 두툼한 입술에 온화한 얼굴들이다. 일부에선 복원공사도 진행중이다. 바푸온 사원은 20세
기 초 보물 찾기에 혈안이 된 프랑스인들이 해체한 뒤 버려졌던 사원으로, 최근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유적은 자연 속에 방치된 모습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극락왕생
을 위해 지었다는 불교사원 타프롬으로 들어서면 힘없이 쇠락해가는 인간의 건축물과 자연의 엄청난 위
력의 대비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무너지고 쓰러진 사원 회랑과 담벽에 마치 먹이를 통째로 감아쥔
거대한 뱀처럼, 수백년 묵은 나무들이 뿌리를 뻗어 굽이치는 모습이 숨을 멎게 한다. 새들의 배설물로
옮겨진 씨앗이 싹터 자란 벵골산 보리수나무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무수히 흩어져 있는 이 천
년 유적들을 하루이틀에 다 살펴보는 것은 무리다. 입구에서 파는 1일권(20달러)·2~3일권(40달러)·
4~7일권(60달러) 등 ‘앙코르 패스’를 골라 사서 둘러볼 수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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