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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백세인들은 사교적이었다. 마을 단위 모임에 꼭 참석했고, 나이가 20~30세 어린 노인들과 ‘친구’로 지냈다. 가족과 함께 살지 않더라도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노인들은 장수했다. 이들은 남에게 빚지고는 못 살았으며 서로 간에 ‘셈’이 분명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대인관계에서 가장 큰 충격은 친지나 가족의 죽음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죽으면 잇따라 마을 노인들이 세상을 뜨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식의 죽음에 대해 가장 큰 충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박상철(朴相哲·53) 서울대 의대 교수의 체력과학노화연구소와 조선일보 취재팀이 전국의 백세인 150명을 인터뷰해 이들의 대인관계와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분석한 결과 드러났다.
▲마을 일에는 반드시 참견해야
박응섭(101·강원도 고성군) 할아버지는 지금도 마을에서 ‘펄펄’ 난다는 말을 듣는다. 팔과 다리에 힘과 근육이 남아 양지바른 날이면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참견’을 한다. 이 때문에 마을에선 ‘배봉리 연대장’이라고 부른다. 김양순(101·전남 구례군) 할머니는 “이 나이에 친구들은 다 저 세상으로 갔지”라며 “스무 살이나 서른 살쯤 어려도 다 친구들로 사귀어야지”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아들들이 잘해 줘. 철 따라 수박도 사오고 참외도 사오고 고기도 많이 가져와. 손자들도 서울에 많은디, 다 이뻐. 특히 큰 손자는 든든하고 그러제”라며 가족 친지들에 대해 ‘덕담’을 했다. 김 할머니는 결코 남을 나쁘게 말하는 법이 없다고 주위에선 말한다.
안아지(98·전남 보성군) 할머니는 주변에 인가가 드물어 7~8마리의 고양이와 개 한 마리가 친구라고 했다. 찾아오는 사람은 없지만 안 할머니는 “심심하지 않다”고 했다. 동물들과 이야기하고 밭을 매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고 한다.
동거하지 않는 자녀와 접촉하는 횟수를 백세인 54명에게 물었더니 40%는 월 1회 이상 접촉, 17%는 1년에 1~2회, 23%는 집안행사(결혼식, 회갑연, 장례식)가 있을 때, 21%는 전혀 접촉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가족이 없는 백세인도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 무리 없이 살 수 있다고 답했다.
▲사진설명 : 전북 순창군 팔덕면 월곡마을 노인들이 마을야유회 때 꽹과리를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있다.
강나순(101·전남 영광군) 할머니는 독거 노인이지만 이웃 사촌이 많아 외롭지 않다고 했다. 강 할머니는 “이웃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 반찬 등을 마련해 준다”며 “돌봐주는 이웃들이 자식보다 더 좋다”고 했다. 역시 독거노인인 유옥순(94·강원도 양구군) 할머니도 이웃 아이들이 오면 컵라면을 끓여줄 만큼 인심이 후해 아이들부터 할머니까지 유 할머니의 집은 사교의 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했다. 나영화(98·강원도 화천군) 할머니는 청각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으나 여전히 마을에선 달변가로 통한다. 나 할머니는 “친구가 45명이 넘는다”며 집안 일, 마을 일을 소재로 마을 노인 모임의 대화를 이끈다고 했다.
백세인들은 대인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 외모에도 신경을 쓰는 이가 많았다. 박원성(94·강원도 인제군) 할머니는 최근까지 직접 화장하고 피부관리를 했다고 한다. 박 할머니는 “늙어도 다른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며 “그래야 다른 사람을 만나도 즐겁다”고 했다. 이달성(100·서울 홍제동) 할아버지는 동네 멋쟁이로 통한다. 항상 정장과 구두에 겨울에는 토끼털 모자, 여름에는 ‘김두한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가족·친구 죽음을 가장 슬퍼해
백세인들은 사람을 사귀면서 겪는 가장 큰 슬픔으로 가족·친구의 죽음을 꼽았다. 양도희(102·강원도 횡성군) 할머니는 슬하에 3남2녀를 뒀지만 모두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현재 손자 내외와 살고 있는 양 할머니는 “손자와 며느리에게 미안하다”며 “죽는 약이 없냐”며 가슴을 쳤다. 그는 마루에 있는 손자(56)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아직도 손자가 밥상을 차린다”며 미안해 했다. 얼른 죽고 싶어서 농약이 묻어있는 채소를 씻지 않고 드신 적이 있다고 한다.
김양순(101·전남 구례군) 할머니는 죽음에 대해서도 달관한 듯했다. “의사가 주사를 주니까, 내가 그랬지. ‘아 얼른 죽게 하지. 왜 이런 걸 줘요.’ 요즘도 이웃들과 친하게 왕래를 해. ‘노인당’도 자주 가고. 친구들도 많지만 나만치 나이 먹은 사람 별로 없어. 다 죽고.” 그러나 김 할머니는 “난리(한국전쟁)가 났을 때 경찰이던 큰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일 지랄 같았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동거동락했던 가족·친구의 죽음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그래서 줄초상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전남 구레군 구례읍 신성리 시동마을에서 지난 10년간 80세 이상(사망 당시 나이) 사망자 수는 12명. 이 중 5명(42%)이 92년 한 해, 그것도 같은 2월에 사망했다. 이듬해 93년에는 80세 이상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 다른 마을도 사정은 비슷해 용방면 신도리 신기마을은 10명 중 4명, 같은 면 중방리 송정마을은 8명 중 3명, 토지면 외곡리는 13명 중 4명이 같은 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각각 전체 사망자의 40%, 38%, 30%가 한 해에 줄초상을 당한 셈. 노인 간 인간관계가 장수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지역 단위 노인대상 프로그램은 이런 점에서 노인 장수의 한 대안일 수 있다고 연구팀은 제안했다. 경북 예천군은 10년 사이 장수도가 증가한 지역. 예천군 풍양면 청운리의 노인 회관은 40여명 노인들의 둥지가 됐다. 회장인 정시동(91) 할아버지는 “노인들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주방과 거실, 할머니 방과 할아버지 방, 노래방 TV 및 취사도구와 컴퓨터까지 갖춘 이곳에선 노인 생일잔치도 열리고, 노인 검진도 이뤄진다. 월드컵 때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함께 응원하기도 했다.
최윤호 성균관대 의대 교수는 “마을 주민끼리 가까운 농촌은 동네 친구의 사망이 친척의 죽음만큼 엄청난 충격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스트레스는 심장과 위에 타격을 주기 때문에 정신적·신체적 기능이 약해진 노인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전국에 지역단위 노인 지원 프로그램이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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