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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과 웃음이 그 시대의 집단적 삶을 잘 드러낸다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이 점점 늘고 있다.
서정범 경희대 교수처럼 농담과 웃음의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학자도 있고 베르그송과 프로이드를 참조하여 농담과 웃음을 인간적 주체의 문제와 연관시키고자 하는 논문도 더러 눈에 띈다.
참새시리즈, 최불암시리즈, 사오정시리즈가 각기 그 시대의 일상정서를 증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는 것은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다.
도대체 요즘의 황당하기 그지없는 '썰렁한' 농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가장 유행한다는 3행시 개그를 한 예로 들어보자. '전두환 : 전 대머리예요, 두발이 없다는 뜻이죠, 환장하겠어요.' '노태우 : 노태우라고 합니다, 태우라고도 하지요, 우습죠?' '해파리 : 해파리야, 파리가 너 좋아한데, 리얼리?' 이것은 야유인가 말장난인가, 은유인가 직유인가.
베르그송의 말대로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웃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진돗개나 앵무새도 웃지 않는다. 웃음은 연상 작용이 파괴될 때 터진다.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우리를 파안대소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연상 작용이 그의 기발한 착상을 뛰어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그 콘서트'가 점점 재미없어지는 것은 그들의 아이디어가 우리의 연상작용 아래 헛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웃음은 관계의 틈새를 뚫는다. 웃음은 상호관계의 허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관계 그 자체를 거꾸로 보게 만든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근엄한 교훈을 듣다가 웃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상무이사의 훈시를 들을 때 우리는 웃는다. 그 웃음으로 우리는 당장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재조명한다. 상대방의 웃음을 전제로 하는 농담이란 바로 이같은 속성에서 강력한 전염성을 갖는다. 남을 웃기고 싶다는 것은 그와 나의 관계를 비틀어봄과 동시에 우리의 일상을 거꾸로 해석하려는 무의식의 소산이다. 이러한 전제를 승인한다면 요즘의 '썰렁한' 농담은 문자 그대로 '썰렁한 시대에 대한 패러디'이다. 진리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진리란 있긴 있는가. 솔직히 오늘날 우리의 일상 자체가 진리와 진실이 사라진,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썰렁함 그 자체가 아닌가.
대통령의 연두회견도 야당의 폭로도, 386 정치신인의 포부도 모두 속셈을 숨긴 헛소리로 들리는 요즘, 그 가자가 실력행사를 하고 어쨌거나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요즘, 우리는 계단이 있을 줄 알고 디뎠다가 깜짝 놀라는 경우처럼 썰렁한 개그를 듣고, 또 그것을 전파하면서 썰렁한 웃음으로 썰렁한 시대를 허허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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