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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가장 예측가능한 일 중 하나가 인간 수명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앞으로 등장할 장수사회에 대한 과제를 짚기는커녕 노인문제에 대한 기본적 인식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한 통계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겨우 24세에 불과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을 분 아니라 천연두·콜레라 같은 전염병도 자주 돌았다. 굶주린 사람이 늘 죽음 근처에 널려 있었다. 불과 50년, 1백년전의 일이다.
그러나 20세기 말엽에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20세기 초엽보다 꼭 50세 더 증가했다. 1997년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70.6세, 여자 78.1세다. 오늘날의 시인은 더 이상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를 읊을 수 없다.
이런 변화가 의학 수준의 향상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보건학계의 정설이다. 공중보건·영양·주거·경제 형편이 이전 시대보다 월등히 좋아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잘 먹고, 좋은데서 기거하고, 좋은 옷을 입게 된 덕택이다.
인간의 한계수명이 그렇다고 해서 연장된 것은 아니다. 20세기에 의학이 급속도로 발달했다 해도 모든 인간은 옛날처럼 1백세 이상 살기는 여전히 힘들다. 주요 질병은 극복했지만, 노화라는 생명과정을 늦추거나 멈추게 하는 데는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최근 유전공학이 크게 발달하면서 유전자 수준에서 노화의 비밀이 차츰 벗겨지고 있다.
성급하기는 하지만 21세기 첫 4반세기에 노화를 억제하는 기술에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백년간 평균적으로 50년을 더 살게 되었다면, 이후 백 년 동안에는 지금보다 수십년을 더 살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수명연장이 가져올 득(得)이라면 삶의 기회를 더 맛보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크게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랜 삶을 맛보고, 일찍 죽는 공포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은 개개인의 실존(實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경제활동인구가 크게 줄고, 사회에서 소외되는 노인이 늘어나며 노인병의 고통이 확대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평균수명 1백세 또는 1백20세의 미래 사회에서는 수명연장으로 인한 노인의 생리적·심리적·사회적 고통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나아가 경제 생산성이 떨어져 사회구조의 탄력성이 전반적으로 악화될 수 있다.
또 게다가 수명 연장이 유전자 조작에 의해 달성될 것이기 때문에 생명 윤리의 파괴로 인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장수가 행복으로 느껴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장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나 사회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오래 산다는 것 자체는 인간이 현실 속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장수는 결코 생물학적 생존시간을 연장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장수는 사회·경제·문화적 조건이 더욱 인간생존에 적합해질 때 가능하다. 삶의 질이 좋아질수록 장수하는 것이라면 장수는 곧 사회의 질을 가늠하는 것이며 개인의 행복지수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21세기에는 사람들이 훨씬 더 오래 살듯하다. 우리 나라도 오는 2020년께는 평균수명 85세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의학계에서는 '이론적'으로 10여년 뒤에는 1백20세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질병의 정복, 노화 원인의 발견과 예방, 생활조건의 향상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사례들이다.
노년인구의 증가는 그러나 해결해야 할 심각한 과제들을 낳고 있다. 노쇠로 인해 야기 될 수 있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 '적체되는 노년'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사회·문화적 갈등과 생산력 저하, '고려장'을 상기시키는 '노인 제거' 장치의 출현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더 오래 살고 싶은 인간 본연적인 희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수가 가져올 복합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삶 자체를 재조명하는 근원적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장수는 축복인가?
21세기 인류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수명의 혁명적 연장이다. 의학과 생명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1백세를 훨씬 넘는 삶이 인위적 선택의 문제로 다가오리라는 것이다. 태아 성별의 조작, 인간 생체의 복제와 함께 인간수명의 생체공학적 연장은 기본적 인간관과 인간사회의 질서를 그 근저에서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천부인권설적 인간관은 치명적으로 도전 받을 것이면 문명발전의 준거로서 인간 존엄성은 크게 훼손될 것이다. 생명의 절대가치를 실현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지원을 받았던 의학과 생명과학은 구체적 인간개체들의 장수욕구를 실현시켜주는 대신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서비스산업으로 지위가 바뀔 것이다. 생명이 귀한 것은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이고 장수가 축복 받는 것은 장수가 희소하기 때문인데 인간수명의 선택적 연장이 가능한 상황에서 이러한 가치는 유지하기가 어렵다.
사회질서의 차원에서도 한정된 노년기를 전제로 설정된 세대간의 집단적 계약관계가 지탱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비생산적인 혹은 피부양적인 연령층인 노인들을 사회 전체가 집단적으로 보살피기 위해서는 젊은 인구의 기여와 희생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장소의 보편화로 노인인구 비율이 청·장년 인구의 비율과 맞먹거나 넘어서는 상황이 온다면 그러한 기여와 희생으로 문제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급격히 연장되는 노년기를 노인들 자신이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젊었을 때 자녀양육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늙고 난 후 지위와 자산을 젊은 세대에 이양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확산될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 노인집단의 존재는 젊은 세대와의 정신적·경제적·정치적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사실이 가능성은 현실이 되어 이미 많은 사회들에서 서서히 그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보편적 장수시대는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측보다 훨씬 빨리 다가올지 모른다.
적절한 대응책은 따라서 보편적 장수를 받아들이되 급격히 늘어나는 노인들의 새로운 사회적 자리매김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편적 장수에 의해 엄청난 규모와 비율의 노인인구가 존재하는 현상은 어차피 인류역사상 처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사회나 개인 모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소비집단에 머무르는 현대적 노년관은 앞으로 거의 모두가 고령노인이 되는 사회에서는 부작용만 초래할 뿐이다.
젊은 세대를 통솔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노동에 의존하는 전통적 노년관이나 젊은 세대 중심의 사회경제체제 노인들이 얹혀 사는 한 사회적 역동성은 떨어져 사회적 혁신과 진보는 매우 어려워 질 지 모른다.
따라서 기존의 연령분업을 혁신적으로 바꾸고 새로운 세대간의 계약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에 걸맞은 사회적 보장 장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생명의 연장이 가져다 줄 장수사회는 인간사회에 새로운 갈등만을 만들어 낼 뿐 결코 개인에게도 축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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