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大將을 追慕하며!


李明博 大統領 美國 방문때 한국전 참전 전사자 묘역참배,





지금도 나는 천호동에 갈 때면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다가 언덕위로 펼쳐진 ‘워커힐’을 유심히 바라본다.
1950년 6·25로 38선이 무너지고 무장이 변변치 않은 우리 국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무참하게 무너지고 밀리고 있을 때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의회가 한국전 참전을 승인하고 7월 7일에는 유엔 안보리가 유엔군의 한국참전을 결의하자, 미국은 초대 유엔군 사령관에 맥아더 원수를 임명하고 이어서 7월 13일 미8군과 미지상군을 총지휘할 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국에 왔다.
사나운 싸움개 불독의 별명이 붙은 윌튼 H. 워커는 1889년 야성적 기질이 강한 텍사스에서 태어나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명한 패튼 전차군단의 제4기갑 군단장으로 유럽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종전 후 잠시 미국 내 군사령관으로 있다가 맥아더 장군의 부름을 받고 1948년 미 8군 사령관이 되어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전술을 발휘하여 북괴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패주케 했다.
워커 장군은 부산과 함께 중요한 미군의 병참 보급기지인 포항과 영일만을 지켜내는 영천전투를 지휘하면서 적과 밀고 밀리는 한 달여 혈전에서 우리 국군과 미군이 승리했다. 그리고 낙동강 방어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서 거둔 전과로 맥아더 장군의 신뢰를 받고 계속 북진하면서 그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도 미 24사단 소속 중대장으로 북진의 선봉에 섰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2차 대전을 겪고 귀국하여 광복 후 어수선한 과도기에 준동하는 좌경세력들과 빨치산들의 만행을 겪다가 6·25의 전쟁을 3년 간 몸소 겪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4·19 이후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5·16을 거쳐 육군대위로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70년 귀국하기까지 전쟁과 전투의 소용돌이에서 살았다.
국내에서는 한때 카투사로 미8군에서 복무하다 월남에 파병되어 캄란의 미 전투 수송단에 파견되어 미군들과 같이 전투를 하며 생사의 동고동락을 했기에 미군에 대한 애정과 우리를 아낌없이 도와준 미국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으려 한다.
1950년 12월 3일 한국전선에서 워커 장군은 회갑인 61회 생일을 맞이하고, 아들 샘 워커 대위는 북진 때 세운 전공으로 24사단장이 8군사령관에게 표창을 상신해 왔다. 워커 장군은 용감하게 싸워 전공을 세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하여 쾌히 허락하고 직접 표창을 하려 나섰다.
표창장이 든 가방을 짚차에 싣고 직접 운전하여 의정부로 향하던 중 한국군 트럭들이 서 있는 길옆으로 빠져나가다 갑자기 튀어든 한국군 스리쿼터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12월 23일 오전 11시 장군은 현장에서 야전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끝내 목숨을 잃게 되자, 워커 사령관을 대신하여 사단장 처치 소장은 비통한 심정으로 샘 워커대위에게 표장장을 수여했다.
맥아더 원수와 미군들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 지휘관들이 워커 장군을 잃음에 허탈해 하며 애도한다. 12월 27일 전투복에 수류탄을 양쪽 어깨 앞에 달고 있는 공정대 출신의 리지웨이 장군이 동경에서 날아와 8군사령관임무를 수행한다.
미국정부는 워커장군을 대장으로 승진시키고 이승만 대통령은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천호동 앞 한강건너 광장동 뒤 산을 워커힐(Worker hill)이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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