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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골 훈장님

권 오 봉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2동 150-241호(3층)

"하늘 천 따 지, 검을현 누를황~" 해방둥이인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3년동안 서당을 다녔다. 다소 생뚱맞아 보이지만 당시 시골에서 서당은 지금의 보습학원과 같은 풍경이었고 학동들의 연령층은 10대에서 30대까지 다양했다. 여든을 바라보시는 훈장선생님은 평소에 늘 두루마기와 갓을 쓰고 계셨으며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려 위엄이 있고 무서워서 평소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서당에서 나는 통감(通鑑)을 읽었는데, 아침에 서당에 도착해서 훈장님께 책을 드리고 뒤로 돌아앉아 어제 배운 부분을 외우는 것이 하루일과의 시작이었다. 만약 외우지 못하거나 틀릴 경우는 훈장님에게 매서운 싸리 회초리를 맞아야 했고 합격이 되면 새로운 글을 배우고 하루 종일 읽어야 했다. 붓글씨도 연습을 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일기장이었다.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일기를 썼는데 훈장님의 검사를 받고 합격이 되어야만 집에 갈 혜택이 주어지므로 모두 열심이었다. 간간이 휴식시간도 있었으나 뭐니 뭐니 해도 즐거운 일은 훈장님께서 외출을 하실 때였다. 외출을 하시면 그야말로 우리들 세상이었다.

훈장님에게는 열다섯 살 정도 되는 손녀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재롱은 무섭기만 한 훈장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만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무서움이 많은 편이어서 언감생심 훈장님 앞에서의 재롱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런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훈장님의 그림자조차 무서웠던 때였으므로 회초리로 맞지 않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했었는데 깍듯한 나의 행동을 훈장님은 마음에 들어 하셨고 많이 귀여워해주셨다. 이를 두고 학동들은 나를 훈장님의 손서(孫壻)라고 놀리곤 했다.

서당의 가장 큰 행사는 꽃피는 봄에 열리는 개접(開接)과 꽃이 지는 가을에 열리는 파접(罷接)이었다. 이날이 되면 식혜와 떡을 해서 돌렸고 나무그늘 아래에서는 동네 선비 어르신들을 모시고 학동들이 쓴 한시를 감상하는 마을 잔치가 열렸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어르신들이 장원 급제자를 뽑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뽑힌 아이는 당연히 학동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1945년 1월 10일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두음리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시골생활은 낮에는 부모님께서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했으므로 아기인 나를 빈 방에 혼자 놔두고 키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종일 울기도 하고 놀기도 하다가 엉금엉금 기어서 문지방을 넘어 외양간에 가 있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또, 기어 다니다 보니 항상 보리수염에 배가 그을어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봉화군내의 전형적인 산골마을인데 면소재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에는 유독 눈도 많이 오고 날씨가 몹시 추워 한국의 시베리아로 이름난 곳이다. 따뜻한 봄볕이 무척이나 그리워서 마을 이름도 춘양(春陽)이라 했다. 면소재지에서도 12km 떨어진 고향마을은 강원도 산골이나 다름없는 산간 오지였다. 물론 전기, 전화도 없었으며 마을에 들어서면 동네가 너무도 조용하여 건넛마을에서 애 우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마을 앞에는 1,206m의 문수산(文殊山)이 우뚝 솟아있고, 이름도 예쁜 옥돌봉을 거쳐 면소재지인 춘양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지방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당시 지방도로를 달리는 시골 버스는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두 차례 운행을 했다. 차를 타면 허리에 가죽핸드백 같은 것을 찬 여차장이 기계를 가지고 다니면서 버스표에 구멍을 냈다. 승객이 내리고 싶은 목적지가 정류장이 되었고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버스는 아무데나 멈춰 섰다. 그럴 때마다 여차장은 "스톱!"하며 버스를 탕탕 내려치면서 차를 세웠고 승객이 내리기 바쁘게 "오라잇!"하면 차는 떠났다. 버스는 천장이 얕아서 키가 큰 사람은 목을 90도로 구부려야 했다. 또한 자동차 문이 제대로 맞는 것이 없어서 비포장 도로 자갈길을 달리다 보면 안에 있는 승객들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썼고, 어르신들의 수염은 하얗게 변했다. 그때는 승객들이 떡 보따리, 배추 보따리, 참외 보따리, 쌀 보따리, 베로 된 보따리, 검은 광목 보따리, 세끼로 맨 보따리, 끈으로 맨 보따리, 쪼르르 겹쳐진 하얀 바가지 등 짐들을 올망졸망 많이도 달고 다녔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내가 여섯살 되던 해인 1950년 6월, 6.25전쟁이 일어났다. 마을에 폭격이 있었고 대포알이 떨어졌다. 먹을 것도 없는 피난민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는 할머니와 이웃에 사시는 또 다른 할머니와 함께 고향마을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목격했는데, 폭격소리에 놀라 신작로에서 집까지 종종 걸음을 쳤다. 집에 돌아와서도 겁에 질린 나는 하루종일 두 할머니와 함께 불안하게 방안을 서성거렸다. 폭격소리가 멎고 신작로에 나가보니 인민군이 몰던 지프차가 폭격을 맞아 찌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전쟁을 겪으면서 자라서인지 어릴 때 즐겨하는 놀이는 당연 병정놀이였다. 팔뚝과 가슴의 알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몸짱형님들은 아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런 형님들은 병정놀이를 할 때 항상 대장 노릇을 했고 나는 늘 졸병이었다.

문수산은 어린 시절 매일 보면서 청운의 꿈을 키웠던 아름다운 산이다. 그 옛날에는 산삼도 있었고 산돼지, 노루, 토끼, 꿩 심지어 호랑이까지 살았다고 한다. 고향마을의 특산물로는 송이버섯과 춘양목이 유명한데 특히 춘양목은 곧게 자라기 때문에 재목으로 사용시 뒤틀림이 거의 없어서 조선조 때 주로 궁궐을 짓는데 쓰였다고 하며, 최근에는 유명사찰이나 고궁보수 등에 많이 쓰인다고 한다. 춘양목뿐만 아니라 고향에서 생산되는 송이버섯은 전국 생산량의 70%나 된다고 하는데 면소재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약초나 산나물이 많아서 그야말로 봉화는 산이 전부 돈이 되는 셈이다.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아이들은 이 산을 헤매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주워가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정말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는데 점심밥을 못 싸오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배를 곯은 아이들은 남들이 밥을 먹는 동안 운동장에 나가서 공차기를 했다. 빈속에 공차기를 하고 들어온 아이들은 허기진 모습이 역력했다. 이 시절에는 물건이 귀한 탓에 아껴 쓰는 습성이 늘 몸에 배어 있었다. 특히 연필은 무척이나 귀해서 손으로 간신히 잡을 수 있는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썼다. 연필로 글을 쓸 때는 습관적으로 침을 묻혀 쓰는 아이들이 많았다. 공책도 질이 나빠 종이를 만들 때의 원료인 지푸라기가 그대로 섞여있기도 했고 싸구려 종이를 사다가 공책 크기로 썰어서 실로 꿰매서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그나마도 나은 축에 속했다.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일찍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호적상 나이가 서너 살 줄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애들이 흔했다.

1958년 내가 고향에 있는 서벽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는 한 학년이 30명밖에 되지 않았다. 졸업생중 상급학교 진학자는 고작 3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서당에 다니거나 농업에 종사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나 역시 진학을 못하고 검정 고무신 신고 서당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모두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꿈은 있었다. 서울과 대구 등 대도시 중학교로 진학한 녀석들은 방학 때마다 빛나는 배지의 교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고향에 내려왔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0년 겨울 어느 날, 부모님께 면소재지 춘양중학교 진학의사를 말씀드렸더니 어려운 형편이라 난색을 표하셨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원했기에 침묵시위도 해보고 어느 날 아침부터는 밥도 굶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무력감에 말이 안 나오고 밥도 안 들어갔다. 단식투쟁을 시작했던 그날 밤, 나는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쟤가 저토록 원하는데 송아지라도 팔아서 보냅시다." "저 자식이 저렇게 시위를 하니 안 보낼 수도 없고⋯" 이튿날 드디어 중학교 진학 승낙이 떨어졌다. 초등학교 졸업 후 3년만이었다. 승낙을 해주신 부모님께는 죄송하였지만 정말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때늦은 중학교 진학이었으나 오랫동안 갈망하다 들어온 학교였기에 모든 것이 신비스럽고 학교생활 또한 재미있었다. 동기생들이 3년이나 어린 후배가 되다보니 같은 반 73명 중 키 순서로 나는 72번이었다. 교과목 중 한문시간도 있었는데 이 시간만은 가르치시는 한문선생님도 나의 눈치를 살피시곤 했다. 칠판에 한자를 쓰시고는 나에게 꼭 확인을 하시는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 고등학교 입시제도는 지원하는 지역에 제한을 두지 않았고, 고교입시는 서울시의 경우 공동출제로서 국어, 영어, 수학 등 3과목과 체능 및 면접시험이었다. 나는 고교졸업 후 취직을 해야 했으므로 고교 입시 참고서 앞면에 수록되어 있는 전국 고교일람표를 보고 사무직에 종사코자 상업계 고교를 택하게 되었다. 당시 고향에는 상업고등학교가 없었고 인근에 있는 안동이나 영주로 가더라도 타향살이 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서울 소재 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다니던 중학교에서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지원해도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였다. 급기야 담임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하여 아버님을 설득하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는 "우리 아이가 원하고 있으니 떨어지더라도 원서를 써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님께서도 내심으로는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그저 아들의 소원이나 들어주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과 달리 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전국에서 모여든 학우들과 꿈 많은 고교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졸업 후 동기생들은 진학반 180명을 제외하고 취직반 200명은 대부분이 금융기관에 취직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이제한에 걸려 금융기관에 취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라도 취직하기로 마음먹고 지인을 통해 찾아간 곳이 태평로 서울신문사 별관에 위치해 있던 한국종합기술공사였다. 이 회사는 건설부 산하 국영기업체였는데 운 좋게도 이 회사에 취직이 되어 1968년 8월 1일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담당 업무는 경리보조였으나 사실상 사환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많은 직원들 중 내 나이가 24세로 가장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은행 심부름이나 시내 잔심부름은 항상 내 몫이었다. 열심히 근무 후 받은 첫 월급은 6,000원이었다. 당시 하숙비가 5,000원 가량 되었으니 나머지 금액으로는 도저히 용돈도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성실함 하나로 입대 전까지 2년 정도 다녔고 퇴직할 무렵에는 월급이 배로 올라 있었다. 입영 후에는 아버님께서 퇴직금을 포함한 36,000원으로 송아지를 한 마리 사서 기르셨다고 하는데 이 자금은 제대 후 사회생활을 할 때 전세방을 얻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으로 고스란히 다시 쓰인 셈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두 번째 직장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29년간 근무하면서 회계, 계약, 자산관리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2003년 1월 정년퇴직하였다. KIST에서 장기근무를 하는 동안 너무나도 많은 추억이 남아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 중심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환경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출퇴근길의 맑은 공기와 경내 작은 산 속에 서식하는 까치와 꿩, 다람쥐들이며 사계절마다 피고 지는 수많은 꽃들과 정원수들, 넓은 잔디밭과 연못 등은 다른 직장인에 비하여 분명 축복이었다. 또한 나는 일복도 참 많았다. 평소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쁘게 지냈고, 특히 계약업무를 담당할 때는 지금처럼 전산화되지 않고 수작업으로만 하던 시절이라 하루종일 전화통에 시달리다가 퇴근 때 서류를 들고 나와 밤 11시가 넘도록 계약서를 작성하여 다음날 아침에 결재를 올리곤 했었다. 고졸 학력으로 승진에 제한이 있었다는 안타까움만 제외한다면 정말 좋은 일터였다.

KIST에서 재직 중 40세 미만 고졸직원들에게 진급할 수 있는 승진시험의 기회가 딱 한번 있었는데 나는 내 자신이 윗분에게 아부하는 성격이 못되는 탓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승진을 했더라면 좀 더 형편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물론 아내에게는 많이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를 이해해줘 고맙기도 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평생의 소원인 대학의 꿈은 1998년 3월, 53세의 늦은 나이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하면서 이뤄졌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퇴직 1년 전인 2002년 8월 대학 입학 후 4년 반 만에 마침내 졸업을 하게 됐다. 늦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으로 퇴근하는 대신 보충강의를 듣기 위하여 학습관으로 향해야 했고 항상 긴장된 마음으로 과락만은 면하고자 지인들과의 약속도 취소해가며 밤을 새워 시험공부에 매달린 시간들이었다. 배움은 나이가 없는 것이 맞는가 보다.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그만큼 젊어지는 느낌이었고 힘든 시련을 이겨낼수록 가슴속에서는 어떤 희열이 솟구쳐 올랐다. 방송대는 50대 중반의 건조한 내 일상생활에 윤활유 같은 존재였다. 보충수업이 있는 날이면 때때로 학우들과 혜화동이나 성수동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막차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오뎅국물에 소주한잔을 기울이던 그 시절은 그립고 소중한 추억이다.

나는 평소 노는 성격이 못되어 하는 일이 없으면 무료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아서 은퇴 후에도 열심히 일을 찾았다. KIST를 퇴직하던 첫 해에는 어릴 적 서당 다닌 경험으로 국회헌정기념관에서 한자해독작업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서울시에서 주최한 실버취업박람회에 지원하여 서울시 교통지도단속반 소속으로 교통서포터즈 일을 11개월간 하기도 했다. 뒤이어 대한노인회에서 주관한 숲 체험지도자 양성교육을 받은 후에는 동대문구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숲 체험해설을 하기도 했다.

현재 내가 하는 일은 방학중 구청에서 시행하는 청소년독서실 한문예절 강사일과 홍릉초등학교 방과후학교 한문교실 강사 그리고 주말에 월 2회 정도 참여하는 한국은퇴자협회 국가시험 감독관 등 모두 세 가지 업무가 있다. 이 중 2006년부터 참여한 한문교육은 청소년독서실과 홍릉초등학교에서 손자뻘 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인데, 특히 동대문구 관내 청소년독서실에서 진행하는 방학중 한문예절교육은 기초한자와 예절교육은 물론이고 관광 유적지 견학 등 아이들 인성교육을 통하여 자립심을 길러주고 있다. 또한 홍릉초등학교 방과후학교는 현재 본교교사가 참여하는 7개 프로그램과 외부강사가 참여하는 15개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 중 한문교실은 주 이틀간 수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국가공인 한자급수자격증 취득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2010년 8월 28일 실시한 대한검정회 한자급수자격시험은 어린이 11명이 지원하여 4급부터 준5급까지 5명이 합격하였으며, 2006년 이래 현재까지 총 156명이 합격하였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저 멀리서 선생님∼ 하며 달려와 안기는 모습이 예쁘기도 하고 출석을 부를 때 어떤 녀석들은 앞에 나와 거침없이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 당차 보여 좋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엄격한 선생님 앞에서는 상상해 볼 수 없는 장면들이지만 나는 그런 아이들 덕분에 많이 웃는다. 정규과목은 아니지만 똘똘한 이 녀석들의 눈망울을 보면 예절교육을 절대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 한문 이외에 충(忠) 효(孝) 예(禮) 예절교육도 병행하여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어른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했더니 우리 아이들은 우선 인사법부터가 달라졌다. 어른을 만나면 반드시 공수(拱手)를 하고 인사를 하고, 이제는 자기이름 자와 부모님 성함도 대부분 한문으로 쓸 줄 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7년에는 KBS "맹꽁서당" 제작진이 우리 한문교실을 방문하여 촬영해가기도 했다. 방송출연이 처음에는 머쓱하고 어색했지만 적응력 강한 요즘 아이들은 곧 활발해졌다. 이날 진행된 한자왕 선발전에서는 K군이 '영예의 한자왕'을 차지하였는데, 평소 성실한 이 꼬마는 1,500자 수준인 준2급에 합격하여 다른 어린이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어릴 때 서당에서 장원급제자를 뽑아 학동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한때 60여명에 이르던 홍릉초등학교 방과후학교 한문교실 어린이가 이제는 영어, 수학, 컴퓨터 등 인기과목으로 몰려가고 지금은 20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한문교육은 전문적인 한문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배움으로 해서 한글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풍부한 언어생활을 하도록 돕는데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무려 70% 이상이 한자어이기에 한문교육은 우리 아이들이 우리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풍부한 어휘력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여 학습능력 향상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수강하는 학생들이 줄어들어 안타깝다.

2006년 7월부터 주말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시험 감독업무는 그동안 각 기관에서 시행한 각종 자격시험과 정부에서 시행한 공무원 승진 및 채용시험을 주로 서울지역에서만 감독하였으나 최근에는 청주, 원주, 전주, 순천, 안동 등 전국을 순회하며 주말여행하듯 감독을 하고 있다. 언젠가 미용사자격시험에 30여명이 응시한 적이 있다. 자기발전을 위하여 직종에 상관없이 참여하는 그 열정이 보기가 좋았으며 난 시험감독관, 이 일도 참 좋다.

2004년 1월 성균관유도회 동대문지부에 등록을 한 이후부터는 자원봉사에 참여할 기회도 생겼다. 동대문지부의 연중 가장 큰 행사는 구청에서 주관하는 선농대제(先農大祭)였다. 선농대제는 매년 4월, 24절기 중 하나인 곡우일(穀雨日)이 들어있는 주 일요일에 행사가 진행되는데 나는 올해로 5회째 제관(祭官)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5월 성년의 날에 윤리‧도덕 실천을 위한 교화사업으로 실시되는 성년식에 제집사로 참여하고 있으며, 2005년 10월에 실시된 청룡문화제에도 제관으로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매년 가을 추석 차례상 차리기 행사와 2005년 8월 (사)범국민예의생활실천운동본부 소개로 충청북도 충주시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5학년인 G군과 조손결연을 맺어 수시로 편지와 전화도 하며 친손자 못지않게 지내고 있다.

내가 이토록 왕성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사랑하는 가족 덕분인 거 같다. 가정적인 아내와 네 명의 아이들, 그리고 착하고 명랑하여 우리 부부를 평안하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며느리와 성실한 사위가 내 활동의 원천이다. 얼마 전에 태어난 둘째 손자 순훈(純塤)이 등 네 명의 손자 녀석들의 재롱은 온 가정에 웃음과 기쁨을 주고 있다. 이 또한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영원한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나는 60대 중반 나이지만 지금까지도 늘 바쁘다. 놀기만 해야 하는 괴로움은 일만 해야 하는 괴로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다. 일은 삶의 활력과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퇴직 이후의 활동은 물질적 보상과는 상관없이 자유의지로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자족감이나 충만감은 오히려 더 높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