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교과서 역주행’ 시민이 막아내야 한다
작성자 박순웅 작성일 2015-10-09 오전 10:15:46

[사설]‘교과서 역주행’ 시민이 막아내야 한다

 
교육부가 이르면 12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앞서 정부와 새누리당은 11일 당정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키로 했다.
국정화 반대 여론이 계속 확산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다.
민주적 가치는 물론 절차까지 무시한 채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오만한 발상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시민이 나서 역사와 교육과 민주주의의 역주행을 막아내야 할 것이다.

정부·여당은 ‘국정 교과서’의 부정적 뉘앙스를 지우기 위해 ‘단일 교과서’ ‘통합 교과서’ 같은 꼼수를 들고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어떠한 수식어로 포장한다 해도 그 실체를 가릴 수는 없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면 집필·편찬은 물론 수정과 개편까지 정부가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보수정권이 역사 해석 권리를 독점하고, 역사교육을 입맛에 맞도록 통제하겠다는 게 국정화의 본질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국정화 이유로 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며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해괴한 명분을 내세운 장면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한국사 교과서는 해방 이후 줄곧 검정제로 발행돼오다 유신체제하에서 국정으로 전환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왜 이토록 국정화에 집착하는지 짐작할 만하다.
박 대통령이 주도하는 ‘교과서 전쟁’은 유신시대의 유물을 되살려 냄으로써 부친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지난달 2일 서울대 역사전공 교수 34명의 선언 이후 국정화에 반대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한 달여 동안 실명을 걸고 반대 선언에 참여한 교수·교사·학부모·예비교사 등이 5만5000여명에 이른다. 전국 466개 시민사회단체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를 결성해 국정화 저지에 어깨를 겯고 나섰다.
고무적인 일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보다 많은 시민의 각성과 행동이 절실하다. 다양한 관점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배제된 역사교육은 창의적·개방적인 ‘세계 시민’ 대신 권력에 충직한 ‘신민(臣民)’만 양산할 우려가 크다. 미래세대가 신민으로 전락할 경우 개개인의 불행을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시민들은 나의 딸과 아들에게 어떤 과거를 들려주고 어떤 미래를 꿈꾸게 할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 역시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정화 망동을 중단하라’는 결의 수준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당의 명운을 건다는 자세로 국정화 저지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수십년간 자유·자율·개방·다원성을 기반으로 확장하고 심화해온 한국 민주주의가 지금 백척간두의 상황임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 같은 극소수 비민주적 국가만 채택하고 있는 국정 역사교과서가 이 땅에서 복권된다면 이는 한국 민주주의 퇴행의 뼈아픈 징표로 기록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정권은 시민의 자유를 옥죄는 잇단 조치들로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터다.
야당이 여기서 물러선다면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일궈왔다는 자부심도, 대안 정치세력으로서의 존재이유도 모두 포기해야 마땅하다. 시민사회와 야당이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경우 2017년부터 전국의 중·고교에서 ‘정권의, 정권에 의한, 정권을 위한’ 역사 수업이 열리게 될 것이다. 미래세대에게 죄를 지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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