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
참전軍 90명 증언·전사 자료 바탕으로 전쟁의 참상 복원
"몰살 등 가혹 행위도 있었지만 공산 세력서 韓 지킨 戰果 커"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
앤드루 새먼 지음 | 이동훈 옮김
책미래 | 736쪽 | 2만5000원
"열심히 파! 제대로 못 파면 죽는다!"
영국 제27보병여단 존 윌로비 소령은 병사들에게 참호를 깊이 파라고 명령했다. 1950년 9월 23일 낙동강 도하 전투. 새벽 2시쯤 흰 섬광과 엄청난 폭발음이 영국군 진지를 강타했다. 북한군 120㎜ 박격포탄 공격이었다.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대에서 키가 제일 큰 병사 샤프였다. 박격포탄이 낙하했을 때 샤프의 머리는 참호 위로 나와 있었고, 포탄 파편이 그의 머리를 명중하면서 두개골을 날려버렸다. 샤프는 한국전 참전이 결정된 전날 밤 막사에서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질러 동료를 모두 깨웠던 이였다. 동료 병사 프랭크 화이트하우스는 샤프의 꿈이 예지몽이었다고 확신했다.
6·25 전쟁 발발 후 미군 외에 유엔군에 가장 먼저 합류한 군대는 영국군이었다. 영국군 제27여단은 8월 중순까지만 해도 영국 식민지 홍콩에 주둔한 부대였다. 정예부대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아, 홍콩! 플레이보이가 살기에 최적의 땅이지!" 병사들은 주말 해변에서 파티와 수영을 즐기고 홍콩 여인들의 허벅지를 실컷 구경했다. 한국전 참전은 갑자기 이뤄졌다. 북한의 전격 남침으로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 이남으로 전선이 몰리자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해외 파병 부대였던 27여단에 참전 명령이 떨어졌다. 영국은 이후 정예군 41코만도 부대를 추가 파병한다.

- 1950년 12월 24일 미군 함정이 파괴되는 흥남 항구 앞바다에 떠 있다(사진 위). 전쟁은 참혹하다. 두 아이가 죽은 어머니 옆에 앉아 있다(사진 아래 왼쪽). 영국군에 소속된 호주 군인들이 미군 전차를 타고 황해도 사리원 폐허 속을 달리는 모습(사진 아래 오른쪽). /책미래 제공
영국군은 서울 수복 후 북한 지역에 들어갈 때 선봉에 섰고, 평양 진공(進攻) 직전 치열했던 사리원 전투의 핵심 부대였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인 흥남 철수에 앞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도 미군·한국군과 함께했다. 영국군은 6·25 전쟁에서 모두 1087명이 전사했다. 이후 영국군이 참전한 포클랜드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전사자를 모두 합친 수(783명)보다 많은 젊은이가 이름도 알지 못했던 나라에서 벌어진 3년간 전쟁에서 전사했다.
영국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
〈사진〉은 6·25 전쟁 참전 영국 군인 90여명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회고와 전사 자료 등을 참조해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복원한다. "어딜 봐도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이 불타고 있었어요. 어떤 장교는 피부가 모두 불에 타 벗겨져 20분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나무 근처에 한국인 남성들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 옷이 벗겨져 있었고 사지가 절단당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배가 갈려 내장이 없어진 상태였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영국군은 그에게 모르핀을 놔주어 안락사시켰다."

이 참혹한 전쟁에서 부상병 후송이나 포로 보호 같은 교전 수칙은 지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민간인을 몰살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영국군이 거둔 전과(戰果)만이 아니라 이들이 저지른 가혹 행위도 그대로 기록한다. 저자는 "대량 파괴가 자행되고 사지 절단과 죽음이 흔해진 풍경 속에서 윤리는 사라지고 악마의 유혹이 판을 쳤다. 영국군 병사들은 부상당한 적에게도 사격을 가했다. 일부 병사는 더 심한 짓도 했다"고 썼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공산 세력에게서 지켜낸 6·25 전쟁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단호하다. "필자는 '한국전쟁은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북한은 명백한 침략 행위를 자행했다. 그리고 그 침략을 명령한 김일성이 만든 국가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인간의 정신에 큰 손해를 입히고 있다. 1950년에 보여준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일부 병사가 이 전쟁의 대의에 의심을 품기도 했지만 훗날 대한민국에 다시 찾아와 한국인들의 진정한 환대를 받은 참전 용사들은 그런 의문을 더 이상 품고 있지 않다." 원제 'Scorched Earth, Black Snow'(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