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란한 서양의 性文化를 처음 들여온 代表的 新女性들
작성자 박순웅 작성일 2014-04-13 오후 7:36:45
문란한 서양의 性文化를 처음 들여온 代表的 新女性들  


문란한 서양의 性文化를
처음 들여온 代表的 新女性들
 

      
      윤 심 덕(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고향에서 金一葉과 같이 자라 유부남과 사랑하다 
      현해탄에 몸을 던진 최초의 여배우 겸 여가수 尹心悳이나, 

      
      김 일 엽(시인, 수필가, 최초의 여기자. 비구니)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일본 유학하고 
      최초의 여성기자(동아일보) 시인, 수필가로 활동하다
      자유연애로 사생아를 낳아 '어머니'라고 무르지도 못하게 하고
      '스님'이라 부르게 하며 수덕사에서 지내다 죽은 
      비구니 金一葉이나,
 



      
      나 혜 석(최초의 서양화가)
      
      일본유학한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자신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역시 부유한 남편 덕에 당시로는 획기적인 1년 9개월간의 
      유럽여행에서, 독립운동가 최린과 사랑에 빠져 
      귀국 후, 이혼 당하고 행려병자처럼 떠돌다 죽은 나혜석,
      (崔麟, 최린은 천도교 교역자로 일본 명치대에 유학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극렬 친일분자가 되었다.
      1937년, 총독부 기관지인《매일신보》사장이 되어 
      내선일체를 설파했다. 6.25에 납북, 북에서 죽었다.)

       
      모두가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여성들이었는데 
      모두가 서양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서양의 성문화를 먼저 받아 들인 것은 어인 일인가? 
      이들 모두가 이성관계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유교사상으로 억압받아 온 여성들의 인권을 신장하고 
      여성해방운동이라는 것이 이렇게 표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세 사람 모두 어려운 시절에 일본 유학까지 했으면
      어느모로 보나 선택받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핍박받는 나라나, 고달픈 민족을 위하여 기여는커녕
      개인적으로도 불우한 일생을 마친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얘기해야 하나?
      
      
      이 글에서는 우선 윤심덕에 대하여 얘기하기로 하고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를 보도록 하겠다.
      
"사의 찬미 " 와 尹心悳 (1897∼1926)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여성,
      윤심덕의 일생은 화려하고도 비참했고 행운과 수난이 엇갈린 
      삶이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 
      더구나 여성의 사회참여가 막혀있던 시기에 
      그 명성을 남긴 인물이기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평양 남산재교회의 권사부부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남동생인 윤기성은 오늘날까지 불리워지는 [들장미]의 
      가사를 번역했고, 
      여동생인 윤성덕은 미국에 유학한 피아니스트로 
      형제들 모두가 음악적인 소질이 있었다. 
      
      
      
      
      윤심덕은 경성여고 사범과를 나와 강원도 원주의 보통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했다. 
      소질이 인정되어 조선 총독부에 의해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한국 최초의 여성관비 유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녀가 택한 죽음이었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부관페리호상에서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음으로 끝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재능보다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김우진은 호남 대지주의 아들로 서울에 극장을 세우고 
      신극운동에 앞장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윤심덕과의 동반자살로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윤심덕은 김우진의 충실한 애인이었을까? 
      
      그러나 김우진이 유교적 전통 명가의 장남에다 
      자식까지둔 기혼자였으니 
      미혼의 윤심덕으로서는 그로부터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름대로는 그와의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자기자신과 주변으로부터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다른 이성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홍기, 이용문등과 관련된 구설수는 
      그녀의 그러한 사정을 시사하는 듯 하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 는 한국대중음악의 시초였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일본유학까지 마친 
      음악 엘리트였던 윤심덕이 '이바노비치' 의 유명한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 에
      허무와 염세로 가득한 노랫말을 붙여 취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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