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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25 60주년을 맞아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채명신 예비역 장군. /오종찬 기자
최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장성 묘역 대신 제2 병사묘역에 묻힌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이 한국전쟁 중 생포한 적장(敵將)이 맡긴 고아(孤兒)를 자신의 친형제로 받아들여 유명 교수로 키워온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주인공은 고인(故人)의 동생으로 채명신 장군의 장례기간 내내 조문객들을 맞았던 올해 76세인 채 모 교수였다.
채 모 교수는 1951년 초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서 채명신 장군이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 고아였다고 중앙선데이가 1일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당시 대한민국 육군 중령이던 채명신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으며 그 결과 당시 인민군 거물이던 길원팔을 생포했다.
채 장군에게 붙잡힌 길원팔은 채명신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그 소년이) 저기 밖에 있으니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매료된 채명신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친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켜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인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는 것이다.
이 소년은 채명신 장군의 각별한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입학해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 10여 년 전 은퇴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 사이로 지내왔는데,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중앙선데이가 밝혔다.
채명신 장군의 미망인인 문정인 여사는 이와 관련,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았다.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덧붙였다.
총각 시절 본인이 직접 이 소년을 돌보던 채명신 장군은 소년이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시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한편, 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으나 19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戰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고 한다.
故 채명신 장군, 北 사령관이 맡긴 고아를 동생으로 입적해 교수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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