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씨 뿌린 좌파사관… 현대사에 친일·독재 멍에
'소련 몰락' '한국 발전' 보며 民衆 사관 벗어난 학자들
'좌편향' 역사 교과서엔 공산주의 '실패'란 말 없어
학자들도 외면하는 사관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려는가
- 김태익 논설위원
1988년 6월 한양대에서 열린 10개 학술 운동단체들의 연합심포지엄은 지금 떠올려도 생생하다. '80년대 인문사회과학의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내걸었지만 내막은 어떻게 하면 한국 사회를 혁명으로 뒤엎을 것인가 토론하는 자리였다. 그 전해 6월 항쟁에서 거둔 승리로 분위기는 한껏 고조돼 있었다. 한국 사회는 '신식민지 독점자본주의 사회'인가, '식민지 반봉건사회'인가. 노동자나 농민이 주체가 된 민중혁명은 움직일 수 없는 시대적 명령이었다. 제대로 된 학문이라면 혁명의 실현을 위해 '복무(服務)'하는 것이어야 했다. 경제학·사회학·정치학 단체들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가 심포지엄에 참여했다. 지금 대한민국을 상대로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좌파 사관의 씨앗도 이 무렵 뿌려졌다.
그때까지 한국의 역사학에서 현대사 연구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기껏해야 일제시대 연구까지였고 그나마 대부분은 독립운동사 연구였다. 무주공산(無主空山) 같은 현대사 영토에 좌파 혁명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 역사가들이 깃발을 꽂고 주인 노릇을 시작했다. 친일, 독재, 반(反)민중에다 반(反)민족 분단 원흉이라는 멍에가 대한민국 현대사에 드리워졌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됐을 나라, 혁명을 통해 타도해야 할 나라가 됐다.
그로부터 24년, 역사문제연구소는 작년 기관지 '역사 비평' 발간 100호를 맞아 14명의 역사학자에게 '당신의 사관(史觀)은 무엇인가' 묻는 특집을 실었다. 어떤 학자는 "민중만이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학자는 "역사학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역사학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역사가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응답자들이 공통적으로 털어놓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소련 및 동구권 공산주의의 몰락', 하나는 '대한민국의 발전'이었다.
E H 카는 "역사가도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산물"이라고 했다. 역사는 '움직이는 행렬(moving process)'이며 역사가의 역할은 '행렬과 함께 터벅터벅 걸으며 자신이 속한 일행의 생각과 가치를 대변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이다. '역사 비평'에 글을 쓴 역사학자들의 고백은 누가 시켜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역사학자이자 생활인으로서 세계사와 한국 현대사의 변화를 동시대인들과 함께 겪으며 도달한 깨달음의 결과였을 것이다.
'좌편향'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고교 역사 교과서들 가운데 하나를 다시 들춰본다. '냉전의 해체'를 얘기하는 부분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이나 '실패' '붕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사용한 말이 '소련의 개혁·개방'과 그로 인한 '소련의 해체'다. 교과서 내용만 본다면 공산주의는 아직도 실패하지 않았고 몰락한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서술한 부분은 '독재' '군림' '탄압' '협박' '공포' '폭력' '강압' 같은 부정적인 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80년대 말 혁명의 방법을 놓고 벌였던 이른바 '사회 구성체 논쟁'에 관한 수백 종의 책들은 이제 헌책방 구석에서도 보기 힘들다. 한때 혁명에 열정적이었던 학자들조차 외면하는 철 지난 사관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심어주려 하는 게 좌편향 역사 교과서들이다.